서울 만리동 시장 골목을 누비다 보면 정지된 시간과 만난다. 시멘트 계단이 힘겹게 받치고 있는 건물은 한쪽으로 5도쯤 기울었다. 슬레이트 지붕 밑으로는 200년도 더 된 초가(草家)의 흔적이 보인다. 올해로 86년 된 성우이용원이다. 주인장 이남열씨는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이곳에서 가업을 잇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문을 연 이용원은 자체가 박물관이다. 일본제 브라운표 가위는 47년, 독일제 쌍둥이표 면도칼은 130년, 면도칼을 가는 말가죽은 50년, 선풍기와 바론 이발의자는 각각 20년과 35년째 사용하고 있다. 온통 낡고 찌그러진 물건들이지만 요즘 들어 더욱 빛을 발한다. 멋이 깃든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 때문이다. 2대 8 가르마와 상고머리, 다이알 비누의 거품과 덜 마른 수건 냄새, 그리고 사각사각 대는 가위질 소리가 손님을 끌어들인다.
1965년부터 일을 시작한 이씨는 한 30년쯤 지나니 가위 날이 뭔지 알게 되더라며 자신의 이발 철학을 털어 놓았다. "잘 된 이발이 뭔지 알아? 그건 한 달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머리야. 길어서 깎는 머리가 이발이지 모양이 변형돼서 깎는 머리는 이발이 아니야."
작년 초쯤인가,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찾아왔다. 분명 누군지 알았지만 절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이 곳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솜 터진 의자에 앉아야 하고 세면대에 고개를 숙여야 해. 예외는 없어." 한 시간 동안 커트와 면도를 받은 이 회장은 오랜만에 진짜 이발을 했다며 고맙다고 말했다. 동네 아저씨도 대기업 회장님도 이 곳에서는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정직한 기술 앞에 누구나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 그만의 이발관'경영철학'이다.
그에게 인생에 대해 물었다. "서두르지 않는 것, 뭐 하러 서둘러? 세월이 좀먹어? 뭐든 제대로 해야지. 지름길은 없어. 한 손님이라도 만족한다면 그걸로 된 거야" 의외로 간단하다. 느리지만 정도를 걷는 장인, 오늘도 경지에 오른 그의 손끝에서 오래된 가윗날이 경쾌하게 춤춘다.
조영호기자 you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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