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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의 길 위의 이야기] 호강도 병인 양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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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의 길 위의 이야기] 호강도 병인 양하여

입력
2012.05.18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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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우리 부모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다만, 한때 천애 고아이길 바란 적이 있었다. 어른이 된 후에야 그게 얼마나 철없는 생각인지 깨달았다만 그땐 참 간절히도 그런 상상 속에 날 자주 빠트렸던 것 같다.

매일 반복되는 새벽 등굣길이 지겨웠고, 매달 뿌려지는 모의고사 성적표가 두려웠으며, 매년 시작되는 새 학기마다 모든 새로움이 거추장스러웠던 사춘기 골병 속의 나. 그러다 부모 봉양을 행복한 의무로 받아들이게 된 어떤 계기를 만났다. 고3 입시를 치르고 난 어느 날 모친상을 당한 친구의 장례식장을 찾게 되었던 거다.

흰 소복을 입고 흰 양말을 신고 머리에 흰 핀 꽂은 것까지는 평범했는데 미처 제 엄마의 죽음을 예견치 못하고서 샛노랗게 공들여 탈색한 친구의 금발머리가 금박 총채처럼 어찌나 화려하던지. 예고나 하고 죽지 우리 엄마 참 못됐지 않냐. 이 꼴로 나 화장터 따라가게 생겼다, 미친 여자처럼.

차라리 울기라도 하면 맘이 편했으련만 끝끝내 친구는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날따라 허리디스크로 드러누운 엄마의 이부자리 앞에서 펑펑 내 울음이 터졌을 뿐. 하기야 고아라고 다 같은 고아랴. 입양아 출신으로는 최초 프랑스 장관이 된 한 여성의 이야기가 온 언론을 떠들썩하게 뒤덮던 날, 난 이력보다 그녀의 외모에 더 관심을 보였더랬다. 왜 유럽에서 나고 자란 한국 여자들은 검고 짙은 아이라인에 검은 단발들일까.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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