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과 같은 소요가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어요. 지금이 그때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흔히 ‘LA 폭동’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재미동포들에겐 ‘9ㆍ11’처럼 ‘4ㆍ29’라는 날짜로 뚜렷이 각인돼 있다. 가족과 친구들을 뒤로 하고 정착한 이국 땅에서 20년 전에 겪은 충격은 9ㆍ11 테러의 그것에 못지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주류 사회가 사건을 잊은 지 오래됐고, 한인 사회에서조차도 점점 잊히고 있다.
폭동 20주년 앞두고 사건을 정리한 책들이 더러 나오긴 했지만 별 관심을 끌지 못한다. 재미동포 2세 김대훈(35)씨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기로 한 이유이기도 하다.
김씨는 18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인타운 내 학교에서조차도 20년 전의 일에 대해 가르치는 곳이 없다”며 “이런 분위기라면 또 다시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겠다 싶어 메가폰을 잡았다”고 설명했다.
3월 크랭크인 한 영화는 다음달 5~10일 뉴욕에서 열리는 제6회 뉴욕 한인 영화제에서 선을 보인다. 김씨는 영화 제작에 필요한 인터뷰를 위해 최근 서울을 찾았다.
네 살 때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도미한 뒤 30여 년 간 미국을 경험한 그의 눈에는 로스앤젤레스 폭동 이후에도 이주민에 대한 현지 사회의 분위기는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비쳐진다. “2월 플로리다에서 ‘트레이본 마틴’이라는 흑인 고교생이 후드티를 입고 가다 백인 자율방범단원에게 피살된 사건이 있었어요. 용의자는 정당방위가 인정돼 기소되지 않고 풀려나면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는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죠. 복잡한 문제이긴 하지만 이 사건도 한 단면입니다.” 겉으론 평온해도 경제난이 일자리 문제로 압축되면서 인종 및 민족간의 갈등은 오히려 심화해 제2의 로스앤젤레스 폭동 류의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영화 제목은 ‘LA R 20’으로 일단 정해졌다. 로스앤젤레스(LA) 폭동(riot) 20주년에서 따왔다.
김씨는 “20년 전의 사건을 단순하게 반추하는 영화는 아니다”라고 했다. “인종 불문하고 교류하며 잘 지내고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담을 작정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미국 주류 사회에 대한 생각과 비판을 과감 없이 전달할 겁니다.”
그가 처음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이 컸던 건 아니다. 비교적 풍족하게 살아온 그는 법학을 전공했다. 평범한 삶을 살 수도 있었으나, 법을 공부할수록 백인 중심으로 움직이는 미국 사회의 작동 원리를 확인하게 됐다. 좀 더 현실속으로 뛰어들자는 판단에 뉴욕대 필름프로덕션학과로 다시 들어가 2010년 졸업했다. “주류 언론이 보여주는 한국인의 이미지가 너무 안 좋았어요. CNN 등 TV 화면을 보고 있으면 한인들은 미국에서 없어져야 할 것 같았죠. 장총을 들고 있는 장면, 공부만 하고 운동은 꽝인 모습 등등. 장총 장면은 폭동 당시 경찰이 도와주지 않아 직접 방어 장면이었는데도 그런 식으로 한국인을 비하하더군요.”
미 언론의 비뚤어진 보도에 불평 불만만 하기 보다는 창작물을 통해 한국인의 새로운 이미지를 미국 사회에 보여주자고 결심했다. 영화계는 이런 그의 행동을 실천하는 무대였다.
“한국에도 미국처럼 다문화 가정이 급증하고 있고, 이에 따른 사건 사고 등 다양한 사회 문제들이 발생 하고 있잖아요. 결국 한국 사회에 대한 불만이 그렇게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엔 로스앤젤레스 폭동 때처럼 폭발하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미국 동포들은 그걸 20년 전에 겪었거든요.”그의 영화엔 조국에 대한 애정도 담겨 있었다.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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