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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2. 고향에 남은 자취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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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2. 고향에 남은 자취 <35>

입력
2012.05.17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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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지는 않았으나, 그가 내게 말하지 않은 일들이 아직 너무도 많다고 생각하니 함께 살았던 기간이 짧았던 것만 한스러웠다. 나는 자선(慈鮮)이라는 그 아이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처녀의 이름 첫 자가 신통의 사랑하는 어머니를 그리는 것이었음을 그때에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못하였지만 나중에 누이의 이야기가 이리로 돌고, 저리로 흘러서, 시시콜콜해진 대목에 이르러 그의 조강지처에 대한 얘기도 듣게 되었다.

저희 아버지의 이름은 이지언(李之彦)으로 전 풍덕 군수의 서자였답니다. 할아버지가 상소에 이름을 올린 일로 죄를 얻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갔다가 외로움과 고생을 이기지 못하여 현지에서 여인의 바라지를 받게 되었답니다. 여인은 당시 아전 조 아무개의 둘째 딸로 십구 세의 과년한 나이였는데, 할아버지의 처소를 드나들며 편의를 도와주던 조 아전이 자기의 딸을 거두어줄 것을 먼저 청하였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귀양지에서 다섯 해를 보냈고 아버지 이지언은 거기서 태어났다지요. 조정의 흐름이 바뀌어 귀양은 풀렸으나 복직은 되지 않았으므로 할아버지는 첩 조 씨와 그 소생인 지언을 북청에 남겨둔 채 고향인 청주로 낙향했다지요. 할아버지가 낙향하여 때마침 부친이 돌아간 뒤 삼년상을 치러야 했으므로, 상중인 집안에다 축첩한 사실을 밝히지 못했던 것이라 합니다. 할아버지 이 군수는 이전에 이미 장가를 들어 딸만 둘을 보았으니, 비록 귀양지에서 첩을 들였다 하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은 셈이어서, 모친과 일가에 알리고 북청으로 사람을 보내어 조 씨와 아들 지언을 데려오게 하였답니다. 이 군수의 본부인 장 씨는 청풍(淸風)의 오랜 세가인 향반 댁 맏딸로 이 군수가 과거 공부를 하던 때에 처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녀가 물려받은 가산도 적지 않았으므로 한 집안에서 첩과 살기를 거부했다지요. 할아버지 이 군수는 하는 수 없이 두 집 살림을 차려야 했답니다. 선산과 전답이 있는 교외에 본가가 있었고 둘째 집을 관가 부근의 성내에 마련했다지요. 지금은 저희 큰오라버니가 그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만.

아버지 이지언이 비록 양첩 소생이었으나 서자로서 어떤 마음고생을 하며 살았는지 제가 자세히 아는 바는 없습니다. 십여 년 뒤에 본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저희 할머니 되시는 조 씨가 본가에 들어가 살게 되면서 당시의 얘기를 기억하거나 입 밖에 낼 사람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르지요. 순조 임금 때에 경기도와 황해 충청 전라 경상 다섯 도의 유생들이 서류(庶類)를 임용하게 해줍시사고 만인소를 올렸다는데요, 오죽 차별이 심했으면 그러했겠습니까? 양반의 혈육이라도 첩의 소생은 과거의 문과를 못 보게 하였고 신분이 다른 상대와는 마음대로 통혼도 못 하게 하였지요. 양첩(良妾)과 천첩(賤妾)의 자식은 서(庶)와 얼(孼)로 구분되지 않습니까? 서자에 비하면 얼자는 또한 하늘과 땅의 차이겠지요. 아버지는 이십여 세에 잡과(雜科)를 치르고 의원이 되어 한양의 혜민서에 직임을 얻어 있다가 이곳 보은 현에 내려와 정착하였지요. 아버지가 태어나고 몇 해 뒤에 서류의 문과 등용을 나라에서 허통했다지만, 아버지는 벼슬하려고 힘쓰지 않았고 누이들에게 모든 상속 재산을 고루 나누어 드리고 다투지 않았으며 고향인 청주에 살기를 꺼려 했던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는 청주에서 사시다가 돌아가셨지만 저와 작은오라비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저희 아버지 이지언은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의원이 되어 한양에서 돌아와 할아버지의 권유로 뒤늦은 장가를 들게 되었답니다. 잡학이라지만 과거를 통하여 의원이 되었고 서자치고는 군수를 지낸 양반의 자식인지라, 아버지는 향시 출신의 전의(全義)에 사는 생원 댁 따님과 통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유(兪) 씨는 시집을 오시면서 교전비(轎前婢) 동이(同伊)를 함께 데리고 왔습니다. 시집올 때 유 씨가 열일곱이었고 세 살 차이가 있다 하였으니 교전비는 열네 살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딸은 세 살 적에 홍역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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