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최일남(문인) 이순재 변희봉(배우) 김중배 이규태(언론인) 이경식 진념(공직자)…. 몇 년 전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1960년대 서울 도심의 밥집 외상장부에 오른 인사들이다. 정식 옥호는 명월옥이지만 주인의 용모를 따 '사직동 대머리집'이라 불렀다. 메뉴는 막걸리 소주 생선찌개 두부구이 묵무침 등 소박한 것들이었다. 뜨내기들에게도 외상을 줬고 할부로 갚아도 될 만큼 인간미가 넘쳤다고 단골들은 기억한다.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로 시작되는 노래의 가사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은 외상값 덕분에 창작됐다. 탤런트 최불암 모친이 운영하던 명동의 '은성'이라는 술집에서 외상값 독촉을 받자 그 자리에서 펜을 들어 써내려 간 게 이 시다. 이외수는 외상값을 갚기 위해 얼떨결에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당선돼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됐다.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황인숙은 단 석 줄로 이뤄진 '삶'이라는 시에서 삶을 외상값에 비유했다. 누군가에 대한 빚 때문에 사는 게 인생이라는 거다. 왜> 지금>
■ 시대가 달라지다 보니 외상값이 공무원들의 뇌물 수단으로 진화했다. 얼마 전 지식경제부 공무원들이 산하 출연연구원에 술집 외상값을 치르도록 했다가 덜미를 잡혔다. 과거 산업자원부 시절 한국산업기술평가원 직원들이 공무원들 요구로 외상밥값을 대신 갚아줬다 적발된 사례도 있다.
■ 과천 정부청사 앞 식당에 외상값 비상이 걸렸다. 연말이면 상당수 부처가 세종시로 내려가는데 외상값을 떼먹을까 걱정이라는 것이다. 많은 곳은 외상값이 억대에 달한다니 이들에겐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세종시에 분점을 내고 따라가서라도 받겠다는 식당도 있단다. 4년 전 이명박 정부 출범 때 정부조직 개편을 앞두고도 이랬다. 한 식당 주인이 "외상값 좀 값으라"고 정부 게시판에 항의 글을 올려 정부가 실태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정부는 서민지원대책을 내놓는데 영세 자영업자들 외상값 갚는 것보다 확실한 서민대책이 있을까 싶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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