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없다면…. 아마 모든 사람들이 집단 우울증에 빠져들 것이다. 그래도 미래가 있으리란 희망에 내일을 준비하며 오늘에 가치를 부여하는 소수가 있을지 모른다. 덴마크영화 '멜랑콜리아'는 다가올 시간이 없다는 극단적인 가정을 내세워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게 될지를 들여다본다. 미래를 담보로 한 오늘의 가치는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는 것인지, 미래를 알 수 없는 삶에 집착하며 아등바등 하루하루를 영위해 가는 것이 또 어떤 가치가 있는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중심인물은 유능한 광고 카피라이터인 저스틴(커스틴 던스트)과 그의 언니인 전업주부 클레어(샤를롯 갱스부르)다. 골프장 딸린 형부의 호화주택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리지만 우울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식을 망치는 저스틴, 그런 그를 돌보는 클레어의 이야기가 전반부를 구성한다. '멜랑콜리아'라는 거대한 행성이 지구에 다가오고 종말의 공포에 휩싸인 자매와 그 가족들의 사연이 이어진다. 개인과 가족의 정신적 문제를 파고들던 영화는 지구적 집단 신경증으로 이야기를 확장한다.
영화는 우울증을 뜻하는 영어 제목(Melancholia)이 암시하듯 우울한 기운으로 시작해 암울한 결말로 매듭짓는다. 신경질적인 저스틴의 기행들, 저스틴보다는 안정된 듯 보이지만 마찬가지로 불안한 영혼을 지닌 클레어의 흔들리는 눈빛에 포커스를 맞추며 인간이란 왜소한 존재를 묘사한다. 우울증으로 불리는 행성이 지구를 날려버리는 마지막 장면은 현대사회에 대한 경고음으로 읽힌다.
영화의 정서는 내내 어둡지만 화면은 무척이나 탐미적이다.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의 죽음' 등 유명 회화들을 현대적으로 응용한 듯한 미장센이 황홀하다. '어둠 속의 댄서'와 '도그빌' 등으로 매번 독창적인 영화 세계를 선보여왔던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창의성과 미학은 여전하다. 흥미롭게도 그는 오래 전부터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왔다.
할리우드 스타 던스트는 이 영화로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안았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여인의 모습을 잘 표현했으나 프랑스 배우 갱스부르의 연기가 더 눈에 띈다. 이미 2009년 트리에의 '안티크라이스트'로 칸영화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받은 갱스부르의 이력이 수상에 마이너스로 작용한 듯.
트리에는 지난해 칸영화제 기간 중 "히틀러를 조금 이해한다"는 부적절한 발언을 해 영화제로부터 기피인물로 지정됐다. 그가 설화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멜랑콜리아'는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안았을 만도 하다. 우울증과 지구 종말이라는 잿빛 소재를 이토록 아름답게 빚어낸 영화가 또 있을까. 17일 개봉했다. 15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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