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독재민주화투쟁과 빈민운동 중심이었던 학생운동이 이념적 변화를 맞게 된 계기는 역시 1980년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 미국이 '학살'을 묵인함으로써 전두환 신군부 독재를 지원했다는 인식이 운동권에 확산됐다. 이에 따라 우리 사회의 모순은 군부독재나 빈부문제 같은 내재적 요인 외에, 미국에 의한 제국주의적 간여를 타도해야 풀 수 있다는 반미반제(反美反帝) 운동이념이 움텄다. 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은 반미투쟁의 상징적 시발점이 됐다.
■ 이후 학생운동은 80년대 중반까지 민주화투쟁을 우선하되, 반제ㆍ자주통일 과제를 보완한 수준의 민족민주변혁론(NDR)으로 수렴되는 듯했다. 그런데 그 즈음, 반미반제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북한의 주체사상을 통해 재정립한 극단적 인물이 서울대 운동권에 등장했는데, 그가 바로 공법학과 82학번인 김영환이었다. 그가 86년에 유포한 일련의 지하 팸플릿인 '강철서신'은 대학가에 주체사상 바람을 일으키면서 운동권 최대 세력인 NL계 '주사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 김영환은 91년 반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해 묘향산별장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도 했다. 당시 북한 노동당에 가입해 '관악산 1호'라는 암호명을 받기도 한 그는 92년엔 북한과 연계해 남한 혁명을 도모한 것으로 알려진 민족민주혁명당을 조직해 본격적인 지하당 운동에 들어간다. 하지만 현실에 눈 뜬 이상주의자의 절망이었을까. 자신의 술회에 따르면 그는 방북 직후부터 북한 체제에 실망과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 99년에 쓴 전향서에서 북한을 버린 이유에 대해, 그는 범민련 해체를 둘러싼 북한측과의 갈등과 함께, 탈북자 등을 통해 알게 된 북한사회의 비참한 실상 때문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그는 95년 무렵부터 북한 체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황장엽 노동당 비서가 망명한 97년엔 "우리 민족 제1의 과제는 김정일 정권 타도"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 김영환이 최근 중국에서 탈북자 지원활동을 벌이다 현지 공안당국에 의해 구금됐다. 지난날의 안쓰러운 유전(流轉)을 새삼 떠올리며, 그의 조속한 석방을 기원한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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