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정말 완전한 한국인이에요. 그런데도 아이들은 '러시아' '튀기' '헬로우'라고 불렀습니다. "
성장 과정에서 러시아 혼혈이라는 놀림과 왕따를 당했던 정모(17)군이 연쇄 방화를 저지르다 경찰에 붙잡혔다.
정군은 1995년 러시아 유학 중인 한국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정군을 버렸다. 이후 조부모의 손에 이끌려 한국에 온 정군은 2세 때부터 동생과 함께 조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어머니 이상으로 헌신적인 할머니 덕에 초등학교 입학 전까진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아이들은 외모가 다른 정군을 '러시아' '튀기'라며 놀려댔고 왕따도 경험했다. 친구를 사귀었다가도 출생 배경을 털어놓으면 다시금 멀어지곤 했다. 정군은 점차 열등감에 시달렸다. 학교를 가지 않는 날도 늘었고 이를 타박하는 조부모에 대한 반항심에 가출을 시작했다.
정군의 방황은 사춘기가 시작된 중학교 때 더 심해졌다. 결국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고 극심한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도 받았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은 건 2년 후. 할머니의 끈질긴 설득에 중학교 검정고시를 봤고 지난해에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여전히 외톨이였다. 1년 후배인 반 아이들이 정군을 놀리지는 않았지만 대신 말을 거는 친구가 없었다. 결국 입학 3개월 만인 5월 자퇴하고 다시 집을 나갔다. 이 와중에 정군을 찾아 곳곳을 수소문하며 다니던 할머니가 6월 교통사고로 숨졌다. 슬픔에 빠진 할아버지(78)는 정군에게 할머니의 죽음을 탓했고 방황은 더 커졌다. 종묘공원과 뚝섬유원지 등을 돌며 노숙을 했고 오토바이를 훔치거나 시비에 휘말려 주먹 다툼도 했다.
그러다 정군은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올 2월 3일 새벽 1시쯤 광진구 구의동에서, 3월 3일 밤 11시55분쯤엔 광진구 화양동, 다음날 0시30분과 1시엔 다시 자양동에서 두 차례 누군가 수거해 둔 종이박스 더미마다 불을 붙였다. 이처럼 방화놀이를 즐기던 정군은 결국 방화를 한 건물 주변 CCTV에 포착돼 결국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서울 광진경찰서는 15일 정군을 현주건조물방화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고 밝혔다. 경찰관계자는 "정군이 '방화 순간 속이 시원했고 희열을 느꼈다'고 했지만 할머니 얘기만 하면 눈물을 흘렸다"며 "한국피해자지원협회(KOVA)와 연계해 정군이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박철현기자 k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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