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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2. 고향에 남은 자취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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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2. 고향에 남은 자취 <33>

입력
2012.05.15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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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 댁엔 누가 삽니까?

내가 물었더니 주모가 또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 없게 말했다.

아마 사위가 의원을 하구 있을 거요.

나는 이신통에게서 들은 말이 있어서 하나 있다는 누이동생을 떠올렸다. 그의 형은 청주에서 아전을 산다던 말도 기억이 났다. 우리는 점심 요기를 하고는 읍내로 들어갔고 행인들에게 길을 물어 곧 제생약방을 찾을 수 있었다. 야트막한 토담 너머로 기역자의 물림퇴 기와집이 보였는데 대청마루에 손님들이 둘러앉고 가운데서 그들을 응대하고 있는 탕건 쓴 사람이 의생인 듯 보였다. 대문이 열려 있었지만 안 서방과 나는 문 앞에 서 있었다. 대청의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내다보았고 약방의 곁꾼인 듯한 젊은이가 다가왔다.

누구신지요?

여기 이신이란 사람이 있습니까?

안 서방이 묻자 그는 대답 없이 대청 쪽으로 뛰어가 주인에게 알렸고, 탕건 쓴 의생이 마당으로 내려와 공손하게 물었다.

그이는 제 처남입니다만, 손님들은 뉘십니까?

안 서방은 내가 미리 이른 대로 대답했다.

저는 이신의 의형 되는 사람입니다.

허어, 처남은 며칠 전에 떠났습니다. 어쨌든 좀 들어오시지요.

말을 끌어다 마당 한쪽에 수습해 두고 우리는 집의 왼쪽으로 돌아 툇마루가 달린 겹집 뒷방으로 안내되었다. 우리가 들어가 앉으니 주인이 마주앉으면서 말했다.

뵙겠습니다. 송 의원입니다.

강경 사는 안생입니다. 여기 이 분은 이신의 부인이십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앉은 채로 머리 숙여 반절을 하고는 말했다.

이 서방과 인연을 맺은 지 이제 여덟 해가 지났고, 지난 갑오년에는 제가 모시고 살았더니 홀연히 집을 나가 소식이 끊긴 지 두 해가 됩니다.

송 의원은 황망하다는 듯 방바닥에 두 손을 짚더니 고개를 깊이 숙였다.

처음 듣는 일이기도 하고, 워낙에 형님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분이라서…… 아무래도 이런 얘기는 저의 집사람이…… 저는 보던 환자가 있어서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의원이 안으로 향한 방문을 열고 사라진 뒤에 아낙이 들어섰다. 나보다 너댓 살쯤 더 먹어 뵈는데, 무명 흰 저고리에 회색 먹물 들인 치마에다 같은 색의 앞치마를 두른 수수한 차림새였다. 참하게 빗어 넘긴 쪽진 머리에 민비녀를 꽂고 눈은 외까풀에 눈매가 부드럽고 눈꼬리가 긴 것이 제 오라비를 닮았다. 나는 첫눈에도 이신통과 누이의 인상이 닮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주인에게서 들었습니다만,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렇게 입을 뗀 누이는 잠시 말을 그치고 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안 서방은 내외를 하느라고 그랬는지 목례만 올리고는 뒷마당으로 슬그머니 나가버렸다.

느닷없이 찾아와 제가 오라버니의 내자라고 하니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그렇게 말머리를 삼아 열여섯에 그이를 만나게 되었던 인연이며, 그와 엇갈린 뒤에 시집을 갔다가 스스로 뛰쳐나오게 된 사연이며, 갑오 난리에 그가 나타난 것과 부상당한 그를 구완하던 일이며, 그이와 함께 살았던 반년 동안의 살림과…… 그리고 우리의 죽은 아기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다. 누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옷고름으로 닦고 한숨도 내쉬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면서 얘기를 들었다. 내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다가앉으며 손을 내밀었다.

혹시 그것이……

누이가 만지려는 것이 내 왼쪽 손목에 늘 차고 다니던 향나무 염주인 줄을 뒤늦게 알아채고 얼른 뽑아서 내밀었다. 이신통이 세밑에 돌아오마고 집을 떠나며 내게 주었던 정표였다. 향나무를 머루알만 한 크기로 깎고 다듬어 아홉 개의 구슬을 꿰고 인내천(人乃天) 세 글자를 거듭하여 삼세번 새겨넣은 염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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