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은 처음부터 완전히 무장해제됐다. 고색창연한 '적벽가' 초입 아니리를 하다 말고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냥 편한 대로 합시다"라며 판소리의 장르적 경계를 허물고, "정보는 많아도 중요한 뉴스는 없고 지식은 있으되 지혜는 없다"는 세태 풍자로 추임새가 절로 나오게 한 젊은 예인(藝人) 이자람(33)의 힘이다. 능수능란하게 1인 15역을 소화하며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그를 따라 웃고 우는 사이 2시간 20분이라는 짧지 않은 공연 시간은 훌쩍 흘러갔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관객은 일제히 기립했다.
지난해 첫 선을 보였던 창작 판소리극 '억척가'가 LG아트센터에서 앙코르 공연 중이다. 소리꾼 이자람이 대본, 작창(作唱), 소리의 1인 3역을 맡아 브레히트의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을 판소리로 만든 공연이다.
1939년에 쓰인 희곡은 17세기 유럽의 종교전쟁을 소재로 한다. 이 공연에서는 이를 판소리 다섯 마당 중 하나인 '적벽가'의 중국 삼국시대(2~3세기)로 배경을 옮겨 왔다.
전통 판소리는 전쟁 상인의 억척스러운 삶을 버텨 내다 자식의 죽음을 외면할 만큼 비정하게 변해 가는 김순종이라는 여인의 비극적 삶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흔히 판소리에 대해 갖기 쉬운 '고루하다'는 편견은 개입될 틈이 없다. 사설에 적극적으로 끼워 넣은 생동감 있는 현대어 덕분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느끼한 취사병부터 거친 모병관, 애교 많은 뺑마담 등 과장된 목소리 변조보다 역할에 따른 특징적인 움직임과 의성어, 의태어를 적절히 활용한 이자람식 연기도 매력적이다.
여기에 전작 '사천가'에서도 호흡을 맞췄던 연출가 남인우씨의 연출력도 힘을 보탰다. 객석을 무대 위에 배치한 이 작품에서, 억척으로 이름을 바꾼 김순종이 막내딸 추선이 죽은 후 울부짖는 순간, 무대 뒤의 막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무대는 기존 객석의 텅 빈 공간으로 확장된다. 자식을 잃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억척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11~13일 공연에 이어 16, 17일 공연이 남아 있지만, 초연의 매진 기록에 이어 이번 공연도 개막 2개월 전에 티켓이 매진됐다. 회당 150석을 더 늘려 공연 9일 전에 추가로 판매한 티켓도 이틀 만에 다 팔렸다. 하반기에는 파리, 루마니아 초청 공연이 예정돼 있다.
공연계가 시장 확대에 따라 다양한 마케팅을 강구하는 요즘, 소비자(관객)의 마음을 얻는 최고의 마케팅은 상품(공연)을 잘 만드는 일임을 다시 생각하게 한 무대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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