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내 가정의학과 전문의 A씨는 이런저런 질환이 있을 때 찾아오던 단골환자가 배우자와 사별한 뒤 우울증 증상이 있다는 것을 포착했다. 가장 널리 쓰이는 항우울제 종류인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를 처방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2개월 이상 항우울제를 복용하려면 정신과 전문의의 소견이 필요하니 정신건강의학과(이하 정신과)에 다녀오라"고 환자에게 권해야 했다. 환자는 "알았다"고 했지만, 정신과를 찾지 않았다. 정신과에 편견을 가지고 있는 환자를 강제로 보낼 수도 없어, 그렇게 환자의 우울증 치료는 중단되고 말았다.
우리나라는 자살률 세계 1위의 국가다. 그러나 우울증 등 정신건강 문제로 상담ㆍ치료를 받는 비율은 선진국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5.3%에 불과하다. 보건복지부는 이 때문에 정신건강종합대책까지 준비하며 우울증 등의 적절한 치료를 장려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전체 의약품 중 유일하게 SSRI계열 항우울제에만 처방장벽을 만들어 놓아 의료계에 논란이 되고 있다.
SSRI는 6개월~1년 정도 꾸준히 복용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장기간 일정용량 이상을 복용하지 않을 경우, 우울증이 오히려 만성화할 수 있다. 그러나 60일을 초과해 처방하려면 정신과 소견이 필요하고 소견이 없으면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가장 반발하고 있는 곳은 신경과다. 뇌졸중, 간질, 치매 등 신경계 질환 환자 중 30~40%가 우울증을 동반하는데 이를 신경과에서 치료하지 못하고 정신과로 내몰고 있다는 것. 우리나라는 유별나게 정신과에 대한 환자들의 거부감이 커 우울증 치료 단절로 이어지고 있다. 대한신경과학회가 지난 해 28개 대학병원 신경과 외래에서 SSRI를 처방받은 1,15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93%의 환자가 2개월 후 정신과 치료를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과, 가정의학과도 마찬가지. 서울아산병원, 순천향대병원 가정의학과에서 항우울제를 처방받은 환자 100명 중 88%가 "정신과를 방문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서울아산병원 선우성 교수(가정의학과)는 "SSRI가 괜찮은 항우울제이기 때문에 다른 질병으로 왔어도 우울증 증상이 있으면 처방을 한다"며 "그러나 중간에 정신과로 가라고 하니 치료가 중단되곤 한다"고 말했다. 그는 2개월 이상 SSRI를 처방해 건강보험 급여가 삭감된 적도 있다고 했다.
반면 정신과는 항우울제 처방장벽을 풀 경우 정신과 기피를 고착화시킬 수 있으며, SSRI의 부작용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분당서울대병원 하규섭 교수(정신과)는 "SSRI는 잘 알고 쓰면 자살률을 줄이지만, 모르고 쓰면 조울증이 심해지고 자살률을 오히려 높인다"며"더 잘 치료할 수 있는 사람(정신과 전문의)이 있는데 다른 과에서 치료하도록 하는 것은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신과를 편하게 가도록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재반박도 많다. 선우성 교수는 "(전문약 중에) 부작용 없는 약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서울대 김윤 교수(의료관리학과)는 "우울증 환자 3명 중 2명이 치료를 안받는 상황에서 SSRI의 처방장벽을 없애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이어 "정신과 의사가 진료해야 하는 우울증 중증도의 기준을 정하고, 그 외 다른 진료과에서 봐도 되는 기준을 정해서 1차 진료에서 우울증 환자들을 관리할 수 있는 교육과 환경을 만드는 게 급선무"라며 "단순히 기간(2개월)을 나눠서 정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SSRI 처방 제한을 푸는 문제를 검토를 하고는 있지만 의견들이 엇갈려서 아직 어느 한쪽으로 정해진 것은 없다"고 말했다.
◆SSRI(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s)
뇌 속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우울증, 불안증 등이 나타나는데 SSRI는 신경세포에서 세로토닌의 재흡수를 막아 결과적으로 뇌에서 세로토닌을 증가시킨다. 기존 삼환계 항우울제가 어지럼증, 졸림, 입마름 등의 단기 부작용이 나타나는데 비해 즉각적인 부작용이 덜하다. 10여년 전 도입 당시 값이 비싸 건강보험 재정 문제 등 때문에 정신과 외에서 60일 후 건강보험 적용 제한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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