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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250주년, 다산 정약용 다시 읽기] <5> 정약용 vs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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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250주년, 다산 정약용 다시 읽기] <5> 정약용 vs 박지원

입력
2012.05.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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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1737~1805)은 높고 깊고,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넓고 크다. 이 말을 벌써 여러 번 했다. 연암은 무서운 스승이고, 다산은 친절한 스승이다. 친절한 스승은 무릎에 앉혀 놓고 곰실곰실 가르쳐주지만 그 무릎을 벗어나기 어렵다. 무서운 스승 밑에서는 정신이 번쩍 들어도 갈피를 잘 잡아 제 길을 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둘 다 제 힘으로 일어서야 하기는 마찬가지다. 연암은 교란시켜 헝클어 놓고, 다산은 추슬러 정돈시킨다. 다산은 묻고 적고 정리하게 해서 뒤엉킨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낸다. 연암은 물어보고 뒤흔들고 교란시켜서 오리무중 속으로 밀어넣는다.

연암은 태산 같고 다산은 바다 같다. 한 사람은 굽이굽이 꼭대기가 보이지 않아 골짜기만 맴돌다 만다. 한 사람은 가도가도 끝없는 수평선뿐이다. 두 사람은 우리 학술과 예술이 도달한 정점이다. 깊이와 높이와 너비에서 당할 자가 없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르지만 꼭 같다. 달라서 같고, 같으니까 다르다. 두 정신이 합체하면 천하무적이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연암도 다산도 최근 들어 화려한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나라 학술과 문학의 대표 선수인 두 사람의 저작들은 부끄럽게도 너무 방치되어 왔다. 문집에 실린 것이 전부가 아니다. 강진을 비롯한 곳곳에서 문집에 빠진 다산의 친필과 저술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 발굴된다. 제자들의 저술까지 합치면 그 수가 결코 만만치 않다. 잘 모르고 잘못 알던 내용들이 새로 알려지고 바로 잡힌다. 잘못 안 것이 많아서 부끄럽고, 모르던 것이 새삼스러워 화가 난다.

연암은 친필로 고치고 만지고 다듬던 초고본 수십 권이 몇 해 전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학자들이 무척 바빠지게 생겼다. 우리에게 연암은 영국인에게 셰익스피어에 해당한다. 셰익스피어의 원고 초고가 수십 책 발견되었다면 그쪽에서 얼마나 난리를 치고, 세계 영문학자들이 어떻게 열광하겠는가? 새로 나온 연암의 초고를 문집과 대조해보니 한편 한편이 조금씩 매만지고 차근차근 깁고 보태서 완성에 이른 공든 탑인 줄을 알겠다. 연암이 가장 아꼈다는 죽은 누이를 위해 쓴 묘지명은 무려 다섯 번이나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어떤 글은 초고에는 있는데 어째서 최종적으로 문집에서 빠졌을까? 이 책은 원래 이런 모양으로 만들려 했었구나. 무릎을 치고 감탄하고 흥분하다가 어째 이것이 이제야 알려지나 싶어 문득 속이 상한다. 한편으로 즐겁다. 그 전인미답의 경계에 내딛는 내 발걸음이 첫걸음이 될 테니까. 이런 행운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연암의 <칠사고> 와 다산의 <목민심서>

연암의 <칠사고(七事考)> 란 책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두 해 전 학회에서 처음 소개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칠사(七事)는 고려 말부터 목민관들이 닦아야 할 일곱 가지 일을 일컫는 표현이다. 인사고과 시에 채점 항목이기도 하다. 연암이 쓴 <칠사고> 가 앞서의 초고본 뭉텅이에서 새로 나왔다. 분량도 만만찮다. 이것이 <연암집> 에는 어째서 빠졌을까? 여러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고, 체계가 정돈되지 않아 당시의 편집자들이 초고로 여겼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따지면 <과농소초> 도 크게 다를 게 없다.

<칠사고> 는 수령의 일곱 가지 일에 대해 정리한 책이다. 다산의 <목민심서> 와 그 성격과 목적이 꼭 같다. 다만 일곱 갈래를 챕터로 두지 않고, 이 일곱 가지에 포함되어야 마땅할 항목을 세워 관련 내용을 주섬주섬 편집했다. 이 책 저 책에서 옮기되 그대로 베끼지 않고 줄이고 압축해서 핵심을 추렸다. <목민심서> 의 방대호한함에 견주면 10분의 1도 안 되지만, 한 권으로 읽기는 이것만도 충분하리만치 맵짜다.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해서 일목요연하게 만드는 솜씨는 연암이 다산을 도저히 못 따라간다. 연암은 곰배님배 꼼꼼한 사람이 아니다. 핵심을 콱 찌르고 쑥 달아난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던 예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의 사유는 읽고 나면 막막해져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이 혼란스럽다. 다산은 유능한 소방수다. 어떤 큰 불도 그는 방향을 잡아 차근차근 불씨도 남기지 않고 꺼서 재로 변할 뻔한 재산을 확실히 지켜낸다.

다산의 <목민심서> 는 미리 목차를 정해 벽에다 붙여놓고, 제자들을 불러 모아 카드 작업하는 요령을 숙지시킨 후, 일정한 역할을 분배해서 이룩한 집체 작업의 결과다. 다산은 이를 진두지휘한 야전 사령관이었다. 제자들은 일사불란하게 지시대로 움직여 큰 승리를 지켜냈다. 연암은 혼자 앉아서 이 책 저 책 손 가는 대로 뒤져서 그때그때 메모했다. 속도는 느리고 규모는 줄었어도 솜씨야 어디 가겠는가. 엉성한 듯 탄탄하고, 허술한 듯 삼엄하다. 특히 원래 인용 근거가 되었던 원전과 연암이 간추린 문장을 비교해보면 간추려진 품새가 과연 연암답다. <칠사고> 가 있어서 <목민심서> 가 있다. 더 많은 관심과 연구가 요구된다.

같지만 다른 작업 방식

연암과 다산은 달라도 한참 다르지만, 문득문득 닮은 데 놀란다. 다산의 지식경영법은 일찍이 연암 그룹들이 작업하던 방식에서 따온 것이 많다. 박제가의 <북학의> 가 그렇고, 유득공의 <발합경> , 이서구의 <녹앵무경> 이 그렇다. 사물의 정보를 수집 축적해서 일정한 체계 속에 재배치하는 방식이다. 연암 그룹과 다산 학단의 작업 방식은 규모만 차이 났을 뿐 놀라우리만치 서로 닮았다.

이들의 정보 검색 능력은 과히 위력적이었다. 이서구가 취미로 기르던 앵무새에 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한다. 소책자의 분량이 되자 박제가에게 보여준다. 박제가는 규장각에서 자신의 검색 엔진을 돌려 이서구가 못 찾은 자료를 찾아 추가한다. 이덕무에게 바통이 넘겨진다. 이덕무는 박제가도 못 찾은 자료를 다시 검색해낸다. 이렇게 한 바퀴 돌고 나면 정보의 총량은 어느새 처음보다 곱절 이상으로 불어난다. 거기에 연암이 서문을 쓰면 책 한 권이 완성된다. 이들이 찾은 정보는 당시 조선의 서책 정보로 수집할 수 있는 정보의 최대치였다. 이덕무와 박제가가 누군가? 규장각에서 그들이 맡았던 직분은 검서관(檢書官)이었다. 말 그대로 서책의 정보를 검사하는 정보검색사에 해당한다.

이런 작업이 다산학단에서도 동일하게 이뤄졌다. 다만 연암그룹이 개별로 각개격파의 방식이었다면 다산은 처음부터 끝까지 집체 작업으로 모든 공정을 관리했다. 작업의 핵심 가치를 정하고 목표를 세운다. 목차의 얼개를 짠다. 작업량을 각자에게 할당하고, 작업 방식을 숙지시킨다. 일제히 달려들어 카드 작업을 마무리 짓고, 한꺼번에 모아서 정보의 우열을 정한다. 다시 역할을 나눠, 공책을 만들고, 카드 순서를 정리하고, 정리된 내용을 옮겨 적는다. 마지막에 '빨간 펜 선생'으로 다산이 나선다. 위쪽에 ×표시 한 항목은 지우고, ○표는 남긴다. 챕터의 시작과 끝에 총괄 정리의 언급을 보탠다. 정리와 재정리의 작업을 다섯 번쯤 거치면 비로소 서문을 얹어 한질의 책이 완성된다.

다산은 그물코가 촘촘했지만, 연암의 그물눈은 성글었다. 다산은 저인망으로 싹쓸이를 했고, 연암은 대어만 듬성듬성 낚았다. 그렇다고 어느 쪽이 더 실속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둘 다 대단하고, 모두 훌륭하다.

넘어야 할 큰 산

연암과 다산은 우리 문화사의 자랑이다. 반드시 넘어야 할 큰 산이다. 할 일이 많고 갈 길이 멀다. 위대한 두 스승의 역량이 하나로 합쳐지면 그 위력이 참으로 막강하다. 오늘날 에 적용해도 여전히 새롭다.

고전은 위대하지만 허투루 보면 고전(苦戰)을 면치 못한다. 위대한 정신을 갈고 닦아 흐려진 빛을 다시 광채 나게 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몫이다. 다산 탄생 250주년! 숫자가 중요하지 않고, 의미를 되새기는 마음이 중요하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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