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이강영의 덧차원 일기장] 불멸의 원자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이강영의 덧차원 일기장] 불멸의 원자

입력
2012.05.13 12:04
0 0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불멸성을 처음 이야기한 것은 기원전 5세기,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였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하는 것은 언제나 늘 존재할 따름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애초에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에게 있어서 진정한 실재는 전체이고, 하나이며, 불멸의 것이었다. 파르메니데스를 받아들이면서 눈에 보이는 자연의 변화를 설명하려고 했던 데모크리토스는 이 불멸성을 구체화해서 원자론을 제시했다. 원자론에 따르면, 원자들의 운동에 의해 우리가 보는 많은 현상이 일어나지만, 원자 그 자체는 불멸의 존재다.

데모크리토스의 불멸의 원자라는 개념은 근대에 이르러 화학의 뒷받침을 받아서 다시 살아났다. 과학자들은 자연에 물질을 이루는 기본 원소가 존재하고, 이 원자들의 결합으로 우리가 보는 다양한 물질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20세기에 들어서 물리학자들은 더 나아가서 구체적인 실체로서의 원자를 발견하고, 심지어 원자의 구조까지 들여다보게 됐다. 현대의 물리학은 원자를 이해하기 위해 발전했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세상은 원자를 이해한 결과로 만들어졌다.

원자는 더 이상 데모크리토스의 개념적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체다. 원자는 내부에 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물질의 기본 입자가 아니라 기본 입자들이 결합한 상태이며, 더 이상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태어나고 변화하는 존재다. 핵물리학과 천체물리학이 발전함에 따라 오늘날 우리는 가벼운 원자의 대부분이 우주가 탄생했던 빅뱅의 순간에 만들어졌으며, 더 무거운 원자들은 별 속의 핵반응에서, 그리고 아주 무거운 원자들은 초신성이 폭발할 때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상상해 보자. 오래 전 우주가 아직 어릴 때, 빅뱅에서 만들어진 수소와 헬륨과 리튬 등으로부터 첫 번째 별이 태어났다. 별들은 스스로 핵반응을 통해 무거운 원자들을 만들고, 죽어가면서 원자들을 우주 공간에 뿌렸다. 우주공간에 흩어진 물질들은 뭉쳐져서 새로운 별을 만들고, 그 별은 죽어가면서 다시 원자를 만들어서 내놓는다. 이렇게, 다음 세대의 별은 앞서 죽어간 별들에서 만들어진 바로 그 원자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상 속에서 원자는 사실상 불멸의 존재다. 불 속에서도, 물 속에서도 원자는 변하지도, 소멸하지도 않고 세상을 떠돈다. 심지어 우주 공간에 흩어져 수백만 광년을 날아서 다른 별, 다른 은하에 가더라도, 원자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죽더라도 그 몸을 이루는 원자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신이 땅 속에서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면 원자는 흙 속에 있다가 물에 씻겨 바다로 갈 수도 있고 식물에 의해 흡수되어 꽃으로 피어날 수도 있다. 혹은 화장을 하면 원자는 공기 속에 흩어져 지구를 떠돌다가, 사막의 모래가 될 수도 있고, 남극의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의 꼬리가 될 수도 있다. 먼 훗날 태양이 사라지고 지구가 없어지더라도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는 다시 우주 공간 어디론가 흩어져서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는 수십억 년 전 어느 별 안에서 만들어져서, 초신성의 폭발과 함께 우주 공간에 흩어지거나 적색거성의 표면에서 흩날려서 떠다니다가 서로 만났다. 우리는 언젠가 우주 어디선가에서 일어났던 초신성의 흔적이며, 수많은 별들의 죽음 속에서 태어난 존재다. 우리는 언젠가 죽겠지만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는 언제까지나 남아서 지구 어느 곳인가, 혹은 우주 어느 곳인가에서 또 무엇인가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자의 불멸성을 아는 물리학자라고 해도 어떤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 죽음을 슬퍼하는 일은 현재의 물리학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현상이지만, 물리학으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슬픈 것은 슬픈 것이고 아픈 것은 아픈 것이다. 그의 몸을 이루던 원자가 세상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알아도, 물리학자 역시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3년이 지났지만, 한밤중에 문득 눈을 떴다가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망연자실하곤 한다.

이강영 건국대 물리학부 연구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