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아웅산, 인도의 간디와 네루, 파키스탄의 부토, 필리핀의 아키노.
이 성씨(姓氏)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대(代)를 이은 반제국주의 항거나 민주화 운동을 통해 정치 명문가로 자리잡은 집안이라는 점이다. 아웅산이나 간디라는 성은 민주화와 독립을 향한 국민의 열망이 반영된 일종의 훈장이다. 이들의 후손은 전대(前代)의 투쟁이 남긴 후광 덕분에 정계에 입문하자마자 여론의 주목을 받고 남보다 빠른 출세의 길을 보장받는다.
우크라이나에서는 티모셴코가 그런 이름이 되고 있다. 율리아 티모셴코(52) 전 총리는 2004년 오렌지 혁명을 통해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권력을 쟁취했으나, 2010년 대선에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에게 패한 뒤 정치 보복을 당해 교도소에 수감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의 큰 딸 예브게니아(32)는 옥중투쟁을 벌이는 어머니의 상황을 목숨을 걸고 외부로 전달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서방 언론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사실 예브게니아는 어머니 율리아가 지난해 8월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되기 전까지는 정치에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고 평범한 생활을 누렸다. 14세에 영국으로 유학 가 런던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한 예브게니아는 어머니가 총리에 오른 뒤에도 모국의 정치권과 엮이지 않으려고 애를 써 왔다. 2005년 영국의 록 가수 션 카와 결혼한 다음에는 티모셴코라는 성도 버렸다.
그러나 어머니가 맞은 불행은 평범한 일상에 머무르고자 했던 예브게니아의 결심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결선투표를 거쳐 티모셴코를 가까스로 누르고 대통령에 오른 야누코비치는 에너지 기업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혐의(권력남용)로 티모셴코를 기소했고, 지난해 10월 법원은 티모셴코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형을 마친 이후에도 3년간 피선거권을 제한해 최대 10년간 정치활동을 할 수 없도록 했다.
"절대 정치권에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라 공언하던 예브게니아는 우크라이나 야권 인사들과 힘을 합해 어머니 구명운동에 투신했다. 다시 성을 바꾸어 '예브게니아 티모셴코'라는 옛 이름도 되찾았다. 예브게니아는 미국, 독일 등 서방국가를 돌며 우크라이나 정부의 탄압과 어머니의 저항을 알리는 데 힘을 쏟았다.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교도관들의 가혹행위도 폭로했다.
예브게니아의 호소는 최근 국제사회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과 바츨라프 클라우스 체코 대통령 등 10개국 정상이 티모셴코 전 총리에 대한 탄압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열리는 중부 유럽 정상회의 참가를 취소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야누코비치 대통령 혼자 정상회의에 나서야 하는 외교적 굴욕을 당하게 됐다. 마누엘 바호주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과 비비언 레딩 집행위원은 우크라이나에서 개최되는 유로 2012 축구대회 참가를 거부했다.
어머니 구명운동에서 큰 지지를 이끌어낸 예브게니아는 "정치인이 되지 않겠다"는 본인의 뜻과 달리 지금 우크라이나 야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로 떠올랐다.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은 한 번도 공직을 맡지 않은 일반인 예브게니아를 벌써 '우크라이나 야권의 구심점'으로 지목했다. 어머니를 쏙 빼닮은 예브게니아가 다시 권위주의로 회귀한 우크라이나에서 '제2의 오렌지 혁명'을 이끌어 낼 지에 전 유럽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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