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년 없는 평생직장… 흙에 살리라"
"고추모종에서 나는 냄새는 유기농 비료가 발효돼 나오는 건가요?"
11일 오전 7시 북한강 파로호와 사명산(해발 1,198m), 용화산(875m) 등 고산준봉에 둘러 쌓여 있는 강원 화천군 유촌리 현장농촌 귀농학교 채소 실습장. 귀농학교 박기윤(46) 교장의 홍고추 재배 강의를 진지하게 듣고 있던 12명의 예비 귀농인들 가운데 한 20대 젊은이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꽃무늬 몸배바지를 착용한 그는 이곳 귀농학교의 막내 김승현(24)씨이다. 그는 지난해 말 군 제대 이후 고향 인천을 떠나 화천 산골로 들어왔다. 이젠 인분냄새 마저 익숙해진 김씨는 "새벽이면 저절로 눈이 떠져 농부가 다 됐다"며 농촌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스스로가 대견스러운 표정이었다. 최근 베이비 붐 세대가 은퇴를 앞두고 귀농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지만 김씨 같은 20대 귀농 희망자는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든 경우다. "어린 시절부터 꿈이 농부였다"는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붙인 명품채소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이다. 그는"선후배들로부터 농촌에 들어가면 노총각이 될지 모른다는 걱정 어린 충고도 많이 들었다"며 "그래도 억대 부농이 되기 위해 농촌에 청춘을 바칠 준비가 돼 있다"고 강한 의욕을 보였다.
베이비 붐 세대인 김석영(53)씨는 30년간 일해온 직장이 지난해 말 부도가 나면서 인생의 2막을 설계하기 위해 귀농학교를 찾았다. 김씨는 아내와 함께 경북 봉화나 영양으로 내려가 1억원 내외의 농지를 구입해 유기농 채소 농사를 짓고 사는 것이 꿈이다. 그는"직장생활을 할 때보다 소득은 다소 줄겠지만 농사를 짓는 것이 정년 없는 평생직장이나 다름 없을 것"이라고 귀농을 결심한 이유를 밝혔다.
현재 이곳 귀농학교에는 12명이 영농교육을 받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청산'에 살며 전원생활을 꿈꾸기보다 새로운 인생의 활로를 찾기 위해 승부수를 띄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박 교장은 "농촌과 전원생활을 동경해 귀농하는 경우도 있지만 퇴직 등에 따라 인생의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는 절박한 심정에 농촌 행을 택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귀띔했다.
2010년 이 학교를 만든 박 교장은 '귀농 전도사'로 불린다. 고려대 85학번인 그는 서울에서 20년간의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2004년 봄 화천 간동면 유촌리에 새 둥지를 틀었다. 대부분의 귀농자가 그렇듯 그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물 조절에 실패해 채소 모종이 썩는가 하면 1,000평(330㎡) 규모의 농지를 빌려 지은 옥수수 밭이 멧돼지의 습격을 받아 수확을 포기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어려움 속에서 정작 도와주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그는 어디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 해야 할지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그는 귀농자들이 농촌생활 적응을 돕는 학교를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돌이켜보면 처음엔 너무 순진했어요. 직업과 삶의 터전을 모두 바꾼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죠. 그래서 체계적인 귀농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을 실감했어요."
이 학교 8개월간의 교육과정에는 귀농선배들이 겪었던 각종 시행착오에 대한 고민과 해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박 교장은 무엇보다 수강생들이 보다 많은 실패를 직접 맛볼 것을 독려한다. '먼저 맞은 매'가 성공적인 귀농을 위한 '예방주사'가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황무지를 연상케 하는 농토개간 작업 등 교육과정에서 이들로 하여금 사서 고생하게 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2010년부터 이곳 귀농학교를 거쳐간 20여명의 예비 귀농인들은 대다수가 농촌생활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올해 교육을 수료하고 화천 유촌리에 뿌리를 내린 배인균(60)씨는 "현장교육과 함께 주말이면 농가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어 정착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성공적인 귀농을 위해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일 까. 박 교장은 우선 귀농을 '시집살이'에 비유한다. 갓 시집 온 며느리가 낯선 시댁에 적응하듯 귀농을 위해서는 자신을 낮춰 농촌문화에 동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는 영농철 마을 품앗이에 동참하는 등 예비 귀농인들에게 틈틈이 직접 농촌의 공동체 문화를 체험할 것을 권한다.
박 교장이 귀농 희망자들에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소득과 비용에 대한 문제이다. 강원지역 농업인들의 연 평균 소득은 3,000만원 내외이다. 귀농한 초보 농업인의 소득은 평균치를 밑돌 가능성이 큰 점을 염두에 두라는 것이다. 여기에 치솟는 땅 값과 자치단체의 지원금 등도 귀농 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 박 교장의 조언이다. 그는 "정착한 뒤에 농촌 주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인간관계를 맺는 것도 성공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화천=박은성기자 esp7@hk.co.kr
■ 귀농 4년차 50대 이남구씨 "팍팍한 삶에 탈진… 흙내음이 그리웠죠"
11일 충북 보은에서 옥천쪽으로 20km를 달려 도착한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 뒷산 중턱.
밀짚모자를 깊게 눌러 쓴 이남구(52)씨는 대추나무와 옻나무가 빼곡한 비탈밭을 쉼 없이 오르내렸다. 손에 묵직한 예초기를 들고 잡풀제거 작업이 한창인 그의 구릿빛 얼굴에선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간혹 가쁜 숨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파릇한 순을 틔운 나무들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이 정도면 4년차 신출내기 농부의 작품치곤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인생의 후반기를 열어갈 무대니까 멋지게 가꿀 겁니다."
이씨가 이곳 산골 오지에 둥지를 튼 것은 2009년 초. 30년 서울 생활을 접고 내려와 부인 박미영(45)씨와 함께 개미처럼 일해 6,600㎡의 밭을 일궜다. 고즈넉한 산중에 자리한 그의 땅에는 '뜰안농장'이란 푯말이 붙었다.
전북 완주의 빈농 집안에서 8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이씨는 고교졸업 직후 상경했다. 일찍 독립하는 게 홀어머니를 돕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는 보험회사에 취직해 어엿한 직장인이 됐고 결혼도 했다. 평탄했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늘 허전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어릴 적 추억이 깃든 농촌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말년엔 시골서 농사지으며 살겠다"는 그의 막연한 생각은 예기치 못한 시련을 겪으면서 현실로 다가섰다.
보험설계사로 억대 연봉을 받기도 했던 그는 IMF시절 투자에 실패해 수억 대의 빚을 떠안았다. 그걸 갚느라 6년여 동안 온갖 고생을 했다. 지긋지긋한 빚을 털어낸 2005년 그는 서울생활을 접기로 마음을 굳혔다. "너무나 빠듯하고 정신 없이 사는 도시생활에 지쳤는데, 힘들 때마다 생각나는 건 흙 냄새였습니다."
그는 먼저 정착할 곳을 물색했다. 후보지는 교통이 좋은 대전 인근 지역으로 잡았다. 충청권이 전국적으로 농산물 유통 네트워크를 갖추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2005년 말 충남 계룡시의 한 마을에 땅을 마련했다. 그러나 곧바로 그 마을에 큰 공장과 아파트가 들어서는 바람에 입주를 포기하고 땅은 헐값에 넘겨버렸다. 이후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던 그는 옥천군 안남면에 들렀다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지형에 끌려 그곳에 뿌리를 내리기로 결심했다.
귀농할 준비도 나름 많이 했다. 인터넷을 뒤지고 서울 근교를 돌면서 차근차근 농사짓는 공부를 했다. 지인들로부터 일년 내내 농사지으려면 수확기가 겹치지 않는 작물을 골라야 한다는 조언도 들었다. 그래서 처음 선택한 것이 양봉과 대추였다.
충북도자치연수원과 옥천군농업기술센터 등에서 교육을 받고 이웃 농가들의 노하우를 익히면서 5개로 시작한 꿀벌통은 현재 100여개로 늘었고, 지난해에는 대추도 처음 수확했다. 옥천군이 특산물로 육성중인 옻나무 1,000그루를 심어 올 들어 옻껍질과 옻순을 전국에 출하하고 있다.
이씨가 고향이 아닌 곳에 터를 잡으며 제일 걱정한 것은 주민들과 어떻게 화합해 살아가는 가였다. 하지만 이는 기우였다. 외딴 곳이 아닌 동네 한복판에 살림집을 마련하고 마을 대소사에 앞장서자 이웃 어르신들은 따뜻함으로 맞아줬다. 그는 바깥일에도 적극적이다. 이사온 직후 안남면 지역산악회인 둥실산악회에 가입했고, 주민자치위원회 간사를 맡아보기도 했다. 그는 현재 옥천군귀농귀촌연합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혼자만 농사짓는 재미에 빠져 산다"고 볼멘소리를 하던 이씨의 부인은 이제 오전에는 힘든 농사일을 돕고 오후에는 마을 도서관에서 봉사하는 '연주리 아낙'으로 변신했다.
이씨는 벌꿀과 황토대추, 옻껍질 등을 팔아 지난 한해 2,000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올해는 3,000만원 정도의 소득을 예상한다. 그는 5년 안에 귀농인들의 '로망'인 억대의 수익을 자신하고 있다. 옻꿀 등 새로 개발한 상품이 인기를 끌고 있고, 도시민을 대상으로 한 농촌체험장 조성 등 자신이 계획해온 일들이 착착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욕심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대신"정년퇴직이 없는 평생직장을 얻었는데 급할 게 뭐 있나요. 소처럼 천천히 가야죠" 라며 환하게 웃었다.
글ㆍ사진옥천=한덕동기자 ddhan@hk.co.kr
■ 귀농 11년차 30대 오진균씨 "흑염소·국화재배 실패 거듭…인정에 못 떠났죠"
울산에서 나고 자란 오진균(31)씨가 연고도 없는 강원 홍천군 화촌면 장평2리, 그 곳에서도 야트막한 산중턱 너머 들판에 자리 잡은 건 2002년. 여기 사람들이 노루가 모여 논다고 해서 노루터라 부르는 곳이다. 월드컵 응원 구호만큼 청년실업이라는 말이 자주 입에 오르내리던 때 인지라 오씨도 고교 졸업 후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다 외진 산골에 들어가게 됐다.
"아버지가 강원도에서 농장을 만들어 보지 않겠냐고 했죠. 취직에 매달리느니 일찍 시작하면 농업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잘만 하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도시병에 시름했다. 오씨는 "풀벌레 소리, 새소리에 밤이면 쏟아질 듯 많은 별까지, 하루 이틀 놀다 가기에 딱 적당한 곳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며 "도시에 대한 향수병이 석 달이나 갔다"고 회상했다.
농촌 일은 만만치 않았다. 오 씨는 귀농 후 처음 3년 동안 흑염소를 키웠다. 잘 키우기도 어려웠지만 판로 개척이 쉽지 않았다. 700두나 되는 흑염소를 팔 데가 없어 사료값만 쏟아 붓는 상황이 한동안 계속됐다. 결국 포기했다. 2005년에는 국화 재배에 도전했다.
"홍천에서 국화를 재배하는 농가가 딱 한곳이 있었어요. 농업대학까지 나온 그 농가 주인을 형님으로 모시고 열심히 배워가며 일을 했죠."
또 훌쩍 3년이 지나갔지만 국화 농사도 접기로 했다. 작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농자 십중팔구가 3년이 못돼 도시로 돌아간다는 얘기가 실감났다.
"흔히들 '계산기 농사'를 하면 안 된다고 하죠. 계산기 두들겨 보면 다 되는 것처럼 보여요. 하지만 사람 사는 데 계획대로 되는 일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거듭된 실패에 도시로 돌아갈까 생각하던 차에 오씨를 붙잡은 건 '사람'이다. 동네어른들은 농사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타박타박 걸어가는 그에게 "막걸리 한 잔 해라" "밥 먹고 가라"며 말을 건넸다. 툭툭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농사로 잔뼈가 굵은 농사꾼의 노하우였다. 그 인정이 큰 힘이 됐다.
"사람 사는 맛이랄까. 그걸 놓기가 싫더라구요. '젊으니까 다시 한번 해 보자' 했죠."
2007년 정부에서 마련한 후계농업인교육에 참가했던 오씨는 해외 농가 견학에서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됐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로 3시간 걸리는 거리에 있는 한 농가를 방문했는데, 내 눈에 전문성이라고 전혀 없어 보이더라구요. 게다가 부부가 레스토랑까지 운영한대요. 이렇게 외진 곳까지 사람이 올까 싶었는데, 주말이면 도시에서 오는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거에요. 이거다 싶었죠."
오씨는 농장에서 생산한 것을 100% 농장에서 소비하는 농업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한우를 들여오고, 사료로 쓸 호밀도 파종했다. 손님 상에 내놓을 채소도 심었다. 마지막으로 농장 안에 고기를 파는 작은 식당을 차렸다. 마침내 식구들 먹고 살기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수입을 얻을 수 있게 됐다.
9살 7살 남매가 잘 자라주는 것도 오씨 부부의 큰 기쁨이다. 오씨의 부인 이경숙(32)씨는 "아이들이 교장 선생님과 하이파이브하고, 교감 선생님이 읽던 책을 빌려주고 같이 토론할 수 있는 학교가 대한민국에 어디 있겠냐"고 했다.
오씨는 "봄 되면 거름 내고 밭 갈고, 여름 되면 모도 심는 게 시골 생활의 흐름이고 이런 생활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성공한다"며 "한 발엔 구두, 다른 발엔 장화로는 농촌 생활을 버텨낼 수 없다"고 말했다.
홍천=이동현기자 nani@hk.co.kr
■ 농림장관은 'Mr. 귀농귀촌'
서규용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자신의 명함에 'Mr. 귀농귀촌'이라고 새겨 넣었다. 뿐만 아니라 사석과 공석을 불문하고 기회만 닿으면 "은퇴하면 고향인 충북 청주로 내려가 귀농하겠다"며 귀농귀촌 전도사를 자청한다.
장관의 열의를 좇아 농식품부의 귀농귀촌 지원정책도 다양해졌다. 우선 다양한 수요층에 맞춰 귀농귀촌 교육을 세분화했다. 제대군인 귀농 교육 등 직업에 따라 또한 권역의 특성에 따라 맞춤형 교육을 진행한다. 그리고 선도농가 실습, 성공 귀농인 멘토제 등 철저히 현장 중심으로 이뤄진다.
급증하는 귀농귀촌 수요에 맞춰 교육인원도 지난해 1,500명에서 올해는 2,370명으로 대폭 늘렸다. 특히 은퇴를 앞둔 베이비부머 등 도시 직장인들의 퇴직 대책을 마련해주기 위해 성공한 귀농귀촌인을 현장 멘토로 활용하는 '귀농귀촌 코디네이터' 교육과정도 5월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예산과 세제지원도 마련됐다. 귀농귀촌인의 안정적 초기 정착을 지원하기 위해 영농 창업 및 주택마련 자금을 연3% 저리로 융자해주기 위한 예산으로 올해 600억원을 배정했다. 또 귀농일로부터 3년 이내에 구입한 농지에 대해서는 지방취득세 50%를 감면해 준다.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 다시 도시로…실패 이유는 농촌 눈높이·몸높이와 융화 실패가 주원인
나름 준비를 철저히 했더라도 귀농귀촌에 실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농림수산식품부가 2008년과 2009년 귀농가구 2,218가구와 4,080 가구를 전수 조사한 결과 각각 145가구(6.5%)ㆍ221가구(5.4%)가 다시 도시로 되돌아오거나 농업이 아닌 다른 업종으로 전환했다. 이들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농촌진흥청 귀농귀촌종합센터 손태식 상담기술위원은 도시와 문화 차이가 큰 농촌공동체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옆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잘 모르는 도시와 달리 농촌에서는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손 위원은 이를 "기존 농촌 구성원과 '눈높이'와 '몸높이'를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표현했다. '눈높이'는 농촌 구성원들의 시각에서 행동하라는 것이고 '몸높이'는 인사를 잘 하라는 의미다.
다음으로 자금 부족을 꼽았다. 귀농을 하게 되면 도시처럼 매달 급료가 나오는 게 아니다. 재배 시작 후 수확 때까지 시간이 걸리고 수확 후 판로가 개척되지 않거나 판매가 부진하면 자금부족에 시달리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에 수중에 적정 수준의 자금이 늘 확보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손 위원의 지적은 농림수산식품부가 전북 진안군 11개 읍면 마을 주민을 모집단으로 귀농귀촌했다 실패한 외지인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이 설문에서 진안군 주민 463명은 외지인들의 귀농귀촌 실패 요인으로 사전 준비부족(47.5%), 자금부족(13%), 소득원 확보 실패(11.4%), 마을 주민과의 불화(9.1%)를 꼽았다.
결국 귀농귀촌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농촌사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역주민들과 하루빨리 관계망을 형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여기에 여유자금을 갖고 있고 안정적 소득원을 빨리 확보하는 것 또한 필수적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 이과장 이어 김부장도 脫도시 인생 2막 '귀향선'이 붐빈다
'2012 귀농귀촌 페스티벌'이 4일부터 사흘간 서울 강남구 서울무역전시관에서 열렸다. 47개 지방자치단체와 농림어업 관련단체 20여 곳이 참여한 행사장에는 귀농귀촌 또는 귀어 희망자가 3만명이나 몰려들었다. 지난해 보다 5,000명이 더 늘어난 것으로 행사를 주최한 농림수산식품부마저 몰려드는 인파에 놀라움을 나타낼 정도였다.
대한민국에 귀농귀촌 바람이 거세다. 지난해 귀농귀촌 가구 수는 관련 현황을 파악하기 시작한 2001년 880가구에서 10배 이상 증가한 1만503가구로 처음으로 1만 가구를 돌파했다. 전년 4,067가구보다는 2배 이상 급증한 것이다.
귀농귀촌이 뚜렷한 사회적 추세로 자리잡으면서 귀농귀촌을 바라보는 도시민들의 시각도 변하고 있다. 예전처럼 도시를 벗어난다는 소극적 개념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와 함께 하면서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적극적 태도로 바뀌고 있다. 또한 단순히 농사를 짓겠다는 '귀농' 개념에서 농촌에 살지만 농사가 아닌 다른 생업을 영위하는 '귀촌'과 어업 양식업에 관심을 두는 귀어(歸漁)로 확장 중이다. 특히 최근 귀농귀촌은 철저한 준비를 통해 여생을 보내는 것이 아닌 '인생의 2막'을 시작하는 개념으로 변모하고 있다.
우선 40ㆍ50대 '화이트 칼라'가 귀농귀촌 인구의 대세로 자리잡았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다. '2012' 귀농귀촌 페스티벌'에서 농림수산식품부가 방문객 5,000명을 설문조사해 이 중 500명을 표본추출해 분석한 결과 귀농귀촌 희망자의 연령은 50대가 40.4%, 40대가 27.8%로 40, 50대를 합치면 70%에 육박했다. 직업도 사무기술직이 31.2%로 가장 많았고 이어 판매 서비스업 23.4%, 가정주부 10.8% 순이었다. 이는 지난해 실제 귀농귀촌한 가구를 분석한 결과와도 일치한다. 지난해 귀농귀촌 가구 1만503호 중 연령별로는 50대가 33.7%, 40대가 25.5%를 차지해 60% 수준이었다. 40대는 2010년 1,229명에서 지난해 2,682명, 50대는 2010년 1,457명에서 지난해 3,537명으로 늘었다.
30대 젊은이들의 귀농귀촌도 늘고 있다. 취업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아예 농촌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젊은 인력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귀농귀촌 가구 중 30대는 1,438명(13.7%)로 전년 553명보다 3배 가까이 늘었다.
귀촌에 대한 선호도 두드러지게 높아졌다. 귀농귀촌 페스티벌 조사 결과 '농업에 본격적으로 종사하겠다'는 응답은 24.4%에 그친 반면 75.6%는 '전원생활 및 자신의 사회경험을 농촌에 적용하겠다'고 답했다. 농업 자체보다는 농촌의 공동체 문화와 전원생활을 누리며 자신이 도시에서 쌓은 경력을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귀농귀촌 가구분석 결과 수도권에 인접하고 연계교통망 발달 등으로 도시 접근성이 좋은 강원도에 귀농귀촌이 집중됐고 그 중 70.3%가 귀촌 가구로 나타난 점도 이런 경향을 보여준다.
정부 정책은 아직 귀촌 희망자 증가추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농식품부는 귀농자에게 농지 구입 등 영농기반시설 구입 때 2억원 한도에서 연 3% 금리 5년 거치로, 주택 구입시 동일한 조건으로 4,000만원 한도 내에서 저리 대출을 해 주고 있다. 반면 귀촌자에게는 정보지원과 텃밭 가꾸기 등 기초적인 교육 지원만 제공하고 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귀촌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어 정부도 지원 대책을 고민하고 있으며 주택 구입시 정책자금 대출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귀어에 대한 관심도 늘어가고 있다. 귀농귀촌 페스티벌에서 600건의 귀어 상담이 이뤄졌다. 이는 지난해에 비해 6배나 급증한 것이다. 수산개발과 관계자는 "전복 등 고소득 작물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귀어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양식 등 수산업은 농업보다 실패 확률이 높은 탓에 실제 귀어자에 대한 정책자금 지원액수는 미미한 수준이다.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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