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툼한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재단법인 무슨 무슨 공원묘지에서 보낸 것이었다. 돌아가신 부모님 산소가 신도시 택지개발에 수용되어 곧 없어질 예정이니 신속하게 이장 절차를 밟아야 불이익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막막했다,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두 분을 모셔야 할지.
실향민 내 부모는 경기 파주 어느 공원묘지에 잠들어 계신다. 파주라는 지역은 우리 가족과 딱히 어떤 연고가 있는 그런 동네는 아니다. 단지, 북 녘 땅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야 훗 날 통일이 되면 죽은 넋이라도 고향 길 가기 가깝다는 아버지 친구 분들 의견을 따라 어머니가 선택한 장소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철부지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고, 교복차림으로 어머니와 함께 영구차에 올라 아버지 마지막 길을 동행했다. 영구차는 듬성듬성 초가집 사이 비좁은 흙먼지 길을 한 참을 달려간 후에 아버지의 관을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딱 관 크기만 한 흙 구멍 속으로 홀로 들어가셨고,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렸고, 그 날부터 파주 공원묘지에 자리 잡으셨다. 입관식을 마치고 친지들과 함께 점심을 먹던 곳은 묘지아래 원두막이 있는 딸기밭 이었다. 나지막한 주변 산에 야생 밤나무를 바라보던 어른들은 "땅의 터가 좋다"느니 "천하 명당자리"라니 말씀하시며 우리 가족들을 위로하지만, 나는 매년 다녀야 할 이 멀고 고된 성묫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철딱서니 없는 상주가 갖는 이 낯선 파주 공원묘지에서의 처음 심정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러 산에 갈 때 마다 음식을 장만하신다. 아침부터 밥이며 국이며 전이며 김치며 참으로 많이도 챙겨 가신다. 그 뿐이 아니다 목장갑에 모종삽 가위, 하물며 낫까지 가방 가득 한 짐이나 된다. 거기에 소주며 향이며 돗자리 성경책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많은 품목이 가방에 들어간다. 승용차가 없는 나로서는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쩌랴, 고작 일 년에 몇 번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어머니의 성스러운 길인데. 우리는 몇 번의 버스를 갈아타고 바리바리 싸온 가방을 매고 공원묘지를 오른다. 늦은 점심을 먹고 산을 내려 올 때 강 건너 어디쯤으로 지는 해가 참으로 붉었다. 이따금 나는 알 수없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 산소 가는 길은 어느 듯 어머니와 나 만의 나들이 길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어머니도 이곳 파주 공원묘지 아버지 곁에 누워 계신다. 어머니가 이곳에 오신 이후, 공원묘지 주변은 많은 것이 변했다.
처음 이곳을 왔을 때 드문드문 보이던 초가집들은 당연히 흔적도 없고, 거기엔 대단위 아파트 단지들과 상가들이 자리 잡고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질 않는 거대 도시가 되었다.
길은 4차선, 8차선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고 시내에서 좌석버스 한 번이면 시원한 에어콘 맞아가며 산소 근처에 한 시간 만에 내려준다.
이젠 승용차 없어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한 나절이면 산소를 다녀올 수 있게 해준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산소 앞에서 식구들과 싸온 도시락을 먹을 수도, 오랜 시간 앉아있을 수 없게 되었다. 점심을 먹던 딸기밭 자리엔 언제부터 자동차 폐차장과 산업폐기물처리장이 하나 둘 씩 야금야금 들어서 있다. 매케한 악취와 연기들이 끊이질 않는다. 중금속이 하늘을 떠다닌다. 채석장 돌먼지와 소음은 망자들을 분노케 하고도 남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곳 공원묘지는 이미 산업화된 문명의 찌꺼기에 포위 되어 깊은 신음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아버지는 이곳에 없는 게 분명하다. 아버지는 생시에도 눈치가 빠른 분이셨다. 여기 상황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이곳 묘지생활을 30년을 넘게 하신 베테랑이다. 아마도 아버지는 전쟁을 피해 월남 하셨듯이, 이미 오래전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 지옥 같은 땅을 떠나 저 어디에선가 나를 부르고 계실게 분명하다. 그래 이참에 이장을 하긴 해야 하는데. 두 분을 어디에 어떻게 모시고, 그것보다 떠나신 두 분의 혼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두툼한 편지 들고 막막할 뿐 이다.
박근형 연극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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