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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을 다시 말한다] <10·끝> 간첩 누명, 그리고 반세기 만의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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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을 다시 말한다] <10·끝> 간첩 누명, 그리고 반세기 만의 복권

입력
2012.05.1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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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은 3대 총선을 앞둔 1954년 3월 '우리의 당면과업'이라는 장문의 글을 썼다. 마치 제갈량의 출사표와도 같은 이 글에서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과 달리 남북통일과 자주독립은 민주세력을 중심으로 해서 성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활동의 계층과 폭을 넓혀야 하고, 지식인들은 세기적 수난자로서 절망감을 극복해 민중을 적극 지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리고 민주 역량을 총집결할 단결체 구성을 제의했다.

2대 대통령 선거 이후 집중된 탄압

이승만 정권은 죽산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와 주변인물에 탄압을 가했다. 대통령선거 사무장이었던 윤길중(尹吉重)은 1954년 5월 총선에 방해공작으로 출마조차 하지 못했다. 사무차장 김성주(金聖柱)는 국가변란 혐의로 연행돼 고문을 당한 끝에 사망했다. 이 시기에 벌어진 조병옥 테러 사건에서도 조봉암을 얽으려는 행태가 드러났다. 군 수사기관은 조병옥에게 조봉암과 함께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들이댔다. 1955년에는 동해안반란사건이라는 조작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대통령이 동해안에 군 시찰을 오면 저격 시해하고 정권을 전복한 뒤 조봉암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조봉암 본인에 대한 탄압도 막무가내로 자행되었다. 1954년 3대 총선에 등록서류를 갖춰 인천 을구 선관위로 가는 도중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빼앗겼다. 선거법은 출마하려면 유권자 100 명 이상의 추천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마감 날 간신히 서류를 만들어 서울 서대문 선관위에 제출했다. 선관위 직원은 추천인을 확인해야 한다며 명부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서 시간을 끌었다. 옆방에는 형사들이 와 있었다. 그들의 공작으로 일부 추천인이 추천을 취소했고, 다시 추천인을 보충하면 또 다른 추천인이 협박을 못 이겨 취소했다. 마감시각이 되자 서대문 선관위는 이중 추천인이 많다며 실격을 통고했다. 현직 국회부의장인 그는 입후보 등록조차 못하고 말았다. 서울 사직동, 조선 선조가 태어나고 성장한 도정궁(都正宮)에 그의 집이 있었다. 그는 거기서 붓글씨를 쓰며 1년쯤 은둔하며 지냈다.

진보당 창당과 3대 대통령 선거 재출마

이승만 대통령은 사사오입 개헌으로 영구집권의 야심을 보였다. 사사오입개헌이란 무엇인가. 재적의원 3분의 2가 찬성해야 개헌하는데 135명으로 하나가 부족했다. 3분의 2는 수학상 135.333이므로 사사오입으로 소수점을 절사하면 135명이 개헌 통과선이라고 우기며 개헌안 통과를 선포한 것이었다.

야당인 민국당과 무소속 의원들은 이에 맞서 뒷날 이 나라의 정통 야당이 되는 민주당의 뿌리가 된 호헌동지회를 결성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붓글씨나 썼던 죽산이 다시 나와 거기 참여하려 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장택상 김성수 박기출 서상일은 찬성, 조병옥 장면 김도연 박순천 곽상훈 등은 반대했다. 신익희는 관망했다. 찬성 그룹은 민주대동파, 반대그룹은 자유민주파로 불렸다. 김성수가 죽산에게 반공성명을 권하며 앞장서 도우려 했으나 갑자기 사망하고 두 그룹은 의견을 조절하지 못해 갈라섰다. 당시 그의 존재감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게 한다.

죽산은 이후 박기출 서상일 등과 함께 혁신정당 구성을 추진했으나 서상일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결국 1955년 광릉회합에서 이승만 정권과 반대하고 민주당에 들지 않은 혁신세력을 결집시켰고 석 달 뒤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진보당 창단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책임 있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 정강을 내걸었다.

죽산은 1956년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공약 10장 중 평화통일을 첫째로 앞세웠다.

'남북한에 걸쳐 조국의 통일을 저지하고 동족상잔의 유혈극의 재발을 꾀하는 극좌극우의 불순세력을 억제하고 진보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국련(UN) 보장하의 민주방식에 의한 평화적 통일을 성취한다.'

진보당이 아직 창당되지 않았으므로 이번에도 무소속 출마였다. 야권단일화를 위해 민주당 공천을 받은 신익희와 협상해야 했다. 죽산이 양보해 신익희가 3대 대통령 후보로 나서고 차기는 죽산이 나서기로 묵계를 맺었는데 선거를 열흘 앞두고 신익희가 급서했다. 결국 이승만과 죽산의 대결로 좁혀졌고 죽산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잠적했다. 1956년 5월 15일 예정대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죽산은 216만 4,000표를 얻었다. 그 결과는 세상을 놀라게 하고 이승만 정권으로 하여금 점점 더 큰 위협으로 여겨 제거를 결심하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죽산의 머리 위에 사신(死神)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는데 죽산은 생명까지 빼앗길 위험으로는 느끼지 않은 것 같다. 일제 강점기 독립투쟁 시절부터 앞날을 예리하게 예측하며 수많은 고비를 뛰어넘고 때로는 과감한 변신을 했던 죽산이 왜 그랬을까. 김성주 사무차장이 고문치사로 죽은 일도 있고, 3대 총선에서 탄압을 받아 후보 등록조차 하지 못했다. 진보의 길, 제3의 길을 가려던 김구와 여운형이 암살당했다. 그런데 그는 왜 자신에게 위험이 닥쳐올 걸 예감하지 못한 걸까. 반공을 국시로 삼는 상황에서 이승만을 꺾고 당선될수 있을거라 믿었을까. 죽산은 무엇을 믿었던 것일까.

명망 높은 장로교 목회자로서 정치적 성향이 강했던 강원룡 목사의 글에 관련된 내용이 있다. 강 목사는 죽산에게 지금 상황에서 절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미국의 공산주의 거부운동 매카시 선풍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미국의 전진기지인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죽산은 '나는 미 대사관이나 미군 책임자들을 자주 접촉하는데 그들이 남북문제 해결을 위해 내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며 고위 장교를 보내 영어를 가르쳐 준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죽산은 미국이 자신을 지지하고 지켜줄 걸로 믿은 것 같다.

닥쳐오는 사신(死神)의 그림자

이승만 정권의 탄압은 주도면밀하게 진행됐다. 조총련에서 밀파했다는 정우갑(鄭禹甲) 사건을 시작으로 박정호(朴正鎬) 사건(조작이 아니라 고정간첩이었다) 등 신문에 오르는 간첩사건마다 죽산의 이름과 사진이 같이 실렸다. 검찰은 죽산과 진보당 간부들이 마치 북한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평화통일론을 주창한 것처럼 몰고 갔으며 상하이 망명시절 죽산과 가까웠던 남북 무역사업자 양이섭(梁利涉)을 군 특무대가 체포해 죽산에게 북한 공작금을 줬다는 진술을 하게 만들었다. 죽산은 위험을 느껴 친구 집으로 피신했다. 1958년 1월 11일 그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고 12일에는 측근인 박기출 윤길중 조규희 조규택 이동화가 체포되었다. 죽산은 13일 오전 집에 전화를 걸어 가족을 안심시키고 서울시경에 전화를 걸어 자진출두를 통고했다.(연구가들의 글이나 신문 자료들과 달리 죽산의 차녀 조임정(曺林晶) 여사는 부친이 경찰 출두 전날 심야에 약수동 집에 잠깐 들렀다고 필자에게 증언했다.)

죽산을 옭아매는 조작된 수사는 각본대로 진행되었다. 재판에서 유병진(柳秉震) 재판장 같은 양심적인 판사가 그를 지키려 했으나 결국 사형선고로 귀결되고 말았다. 2월 27일 대법원 상고심에서 재판장 김세완(金世玩)과 대법관 김갑수(金甲洙) 허진(許晉) 백한성(白漢成) 변옥주(卞沃柱)는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및 간첩 혐의를 인정해 이례적인 파기자판(破棄自判) 으로 사형선고를 확정했다.

6월 20일 주한 미대사관은 국무부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우려와 함께 그 원인을 비공식적으로 부각시키고 영향력 있다고 생각되는 관료들로 하여금 조봉암이 사형당하거나 추방당할 가능성이 없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다울링 미국대사는 이기붕을 만나 사형을 막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장택상은 죽산의 딸 조호정의 호소를 듣고 홍진기 법무장관을 찾아가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만 발표하면 내년 대통령 선거까지 집행을 늦춘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1959년 7월 30일 대법원이 재심 청구를 기각했고 죽산은 다음날 사형이 집행되어 파란만장한 60년의 생애를 마쳤다.

반세기 만의 복권과 명예회복

2007년 대통령 직속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은 정권에 위협이 되는 야당 정치인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표적수사에 나서 극형인 사형에 처한 것으로 민주국가에서 있어서는 안 될 반인권적 정치탄압 사건이므로 유가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2011년 1월 대법원 재심은 무죄를 선고했고, 12월 서울민사지법은 유족에게 24억 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죽산 선생의 명예회복은 부끄러운 과거를 씻는 국가 양심의 상승을 의미한다. 죽산을 거물 정치가로 키워냈던 인천 시민들은 새얼문화재단(이사장 지용택)을 중심으로 죽산 선생 동상 건립 운동을 조용히 벌이고 있고 이미 기금이 7억 원이 넘었다는 소식이다. 여러 가지 기념사업이 펼쳐져 선생의 억울한 넋을 위무하고 선견적 이념과 사상을 발전시켜 미래의 이상적인 민주 복지국가, 통일국가를 기약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것으로 연재를 마친다. 지면의 제약으로 못다 쓴 이야기는 곧 출간할 책에 자세히 쓸 작정이다. 읽어주신 한국일보 독자들과, 증언과 자료를 주신 원로님들, 유족과 연구가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이원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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