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기 종목은 서럽다. 그러나 국제대회에서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내면 화제가 된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는 오래 가지 않는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서러움과 무관심은 반복된다. 럭비 국가대표팀은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과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각각 금메달 2개(7인제ㆍ15인제)를 따내며 화제가 됐다.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TV 광고까지 만들어졌다.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기적은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럭비 대표팀은 다시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투지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럭비 선수를 '러거(Rugger)'라고 칭한다. 최고의 스포츠를 한다는 자긍심으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 엷은 저변, 대중의 무관심 따위는 한국 러거의 투지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한일전, 기적에 도전한다
서천오 감독이 이끄는 럭비 대표팀은 현재 2012 HSBC 아시아 5개국(톱 5) 대회를 치르고 있다. 한국과 일본, 홍콩, 아랍에미리트(UAE), 카자흐스탄이 팀 당 4경기를 치러 아시아 최강을 가린다. 아시아 럭비는 총 6단계로 나뉘어 있다. 톱 5는 '메이저리그'다. 디비전 1(2부)부터 디비전 5(6부)까지 5단계의 '마이너리그'가 있고 단계별로 승강제가 실시된다. 한국은 2010년 톱 5에서 최하위에 머물러 디비전 1로 강등됐다가 올해 다시 '메이저리그'에 복귀했다.
출발은 좋다. 지난 5일 홍콩과의 1차전 원정 경기에서 21-19로 승리했다. 대표팀은 12일 성남종합운동장에서 일본과 2차전을 벌인다. 일본은 아시아 최강이다. 지난해 럭비 월드컵에는 아시아 대표로 출전했다. 14개 팀으로 구성된 프로리그가 운영되고 있고 지역별로 총 46개의 하부리그 팀이 있다. 반면 한국은 실업 팀 5개가 있을 뿐이다. 지난 2010년 경산에서 열린 아시아 톱 5 대회에서 한국은 일본에 13-71로 대패했다. 객관적 전력상 역부족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 러거들은 기적 창출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럭비는 국적에 관대하다. 해당 국가에서 3년 이상 머문 외국인 선수에게 대표팀 자격을 부여한다. 프로리그가 있는 일본은 '용병'이 대표팀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러나 일본은 2019년 럭비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토종 유망주'를 중심으로 팀을 재구성하고 있다. '용병'이 빠진다면 승부는 해볼 만 하다. 98년, 2002년 아시안게임에서도 한국은 '토종 대결'에서 일본을 물리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유영남(파나소닉), 양영훈(혼다), 연권우(요코가와), 박순채(산토리) 등 일본리그에서 활약하는 베테랑에 장성민(고려대) 등 '젊은 피'가 가세한 한국은 '극일'을 통해 한국 럭비의 존재감을 과시한다는 각오다.
희망의 킥을 허공에 차는 슬픈 현실
한국 러거들의 의욕과 투지에 비해 현실은 이에 따르지 못한다. 럭비 대표팀은 인천 라마다 송도호텔에 머물며 일본전을 준비하고 있다. 송도 LNG 스포츠센터에서 훈련을 실시한다. 인조잔디와 천연잔디로 된 축구장 2면을 파트 타임으로 빌려 훈련하고 있는데 럭비 골대가 없다. 서천호 대표팀 감독은"장소가 이런 상황이라 별 수 없이 허공에 가상으로 골대를 그리고 킥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숙소인 라마다 송도호텔의 웨이트 트레이닝 시설은 38명의 대표 선수를 동시에 수용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한국 러거들은 체력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선수들은 궁여지책으로 팀 훈련이 끝난 후 이동하는 도중 버스에서 내려 숙소까지 달려가는 방법으로 기초 체력을 다지고 있다.
격렬하게 몸을 부딪히는 종목 특성상 부상자가 많지만 물리 치료사는커녕 주무도 없다. 오윤석 트레이너는 38명의 선수들을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다. 기본 장비인 스파이크도 지원받지 못하고 있다.
서 감독은 "대표팀에 소집된 선수들이 편안하게 먹고 자고 훈련할 수만 있어도 한국 럭비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선수들의 자질은 뛰어나다. 체격 조건과 스피드가 좋아 일본 프로팀에서도 욕심 내는 선수가 많다. 그러나 대표팀에서 마음 놓고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지 않아 잠재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인기 종목에 쏟는 관심과 지원의 50분의 1만 받아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밝혔다.
인천=김정민기자 goav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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