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 일본의 그래픽 디자이너와 북디자이너 150여명이 참여한 전시'페이퍼로드, 지적 상상의 길' 이 서울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21일까지 하는 이 전시에 일본을 대표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중 한 명인 하라 켄야(原硏哉·54)는 자신이 디자인한 책을 출품했다. 전시를 위해 서울에 온 그는 일정에 ?겨 짧게 인터뷰를 한 뒤 서둘러 중국으로 떠났다.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 교수이자 일본 디자인센터장을 겸하는 그는 디자인의 개념과 철학을 확장한'햅틱(haptic)'론과 '리디자인(redesign)'론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시각뿐 아니라 청각, 촉각 등 인간의 오감을 디자인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개념이 햅틱 이론이라면, 주변의 흔한 사물을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하고 디자인하는 개념이 리디자인 이론이다. 그의 저서 <디자인의 디자인> <리디자인> <햅틱> <센스웨어> 등은 디자인 전공자들의 필독서로 꼽힌다. 그는 건축가, 디자이너, 패션디자이너 등과 함께 자신의 이론을 구현한 여러 전시를 통해 디자인의 새로운 가능성과 실생활에서의 적용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센스웨어> 햅틱> 리디자인> 디자인의>
그의 책은 단순하다. 눈부시게 하얀 종이에 눈 위의 발자국처럼 글씨가 찍혀 있다.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간결함은 그의 디자인 철학의 핵심이자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동양의 '공(空)' 사상과 맞닿아 있다.
"책을 디자인할 때 분명한 이유가 없으면 색을 쓰지 않아요. 단순하면 디자인이 수월할 것 같지만 흰색 종이를 선택하는 것조차 상상 이상의 시간이 걸려요. 같은 흰 종이라도 재질이나 느낌이 다 다르거든요. 색깔 있는 종이보다는 하얀색 종이가, 화려한 폰트보다는 오래 사용된 폰트를 읽기 쉽게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디자인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죠. 이것이 나의 오랜 디자인 철학입니다."
그는 책을 만들 때 단지 보이는 것만을 고려하지 않는다. 햅틱론은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기 때문에 책의 무게, 종이의 빳빳하거나 부드러운 촉감, 다음 페이지로 넘길 때 나는 소리와 느낌까지 여러 요소를 고민한다.
한국의 북 디자인은 어떠냐고 묻자 "한글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고 했다. "한자와 한글을 반씩 섞어 쓸거라 생각했는데, 온전히 한글로 글을 쓰고 한글의 타이포그라피적 디자인이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낸다는 점이 흥미롭더군요."
하라 켄야의 디자인 영역은 책에 머물지 않는다. 오사카의 산부인과ㆍ소아과 병원인 우메다 병원에는 새하얀 면 양말 모양의 이정표를 만들어 줄에 매달았는가 하면, 도쿄 긴자의 마쓰야 백화점에는 백색 건물 외벽에 요철이 있는 물방울 무늬를 찍어 공간에서 촉감이 느껴지게 했다.
최근 그는 도쿄 다이칸야마의 츠타야 서점의 로고, 표지판, 브랜드 디자인을 총괄했다. 그는 이 서점을 중장년층에 맞춰 꾸몄다.
"중장년층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고 자꾸 찾아가고 싶은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디자인의 초점을 맞췄죠."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독서할 수 있는 의자가 곳곳에 배치된 것도 특징이다.
"디자인은 욕망의 에듀케이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비자들의 니즈(필요)보다 욕망이 중요한 것이어서, 디자이너는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수준의 미래 디자인을 제시해줘야 하는 것이죠. 이렇게 불룩 나온 제 배에 맞춰서 옷을 만들면 편하긴 하지만 멋지진 않죠. 멋진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선 제가 살을 빼는 수밖에 없답니다."
한국에도 내가 살고 싶은 집에 대한 욕망이 움트고 있는 요즘, 그는 '하우스 비전(House vision)'이라는 대규모 전시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말 그대로 집의 미래를 제시하는 이 전시는 지금까지 개성이 없는 집에서 규격화한 삶을 살아온 데 대한 반성에서 출발해 아시아의 주거 공간을 '리디자인'하는 프로젝트다. 내년 3월 도쿄에서 시작해 중국 상하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등 아시아 각국을 순회한다. 일본의 토요타 자동차, 욕실용품 브랜드 토토, 그가 디자인을 총괄하는 의류ㆍ생활잡화 브랜드 무인양품을 비롯해 생활가전 제품까지 망라하고 디자이너, 건축가 등이 대거 참여한다.
"새로운 주거문화를 제안하는 것이죠. 집에서 출발하지만 자동차, 에너지 등 집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로 범위가 확장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선 일상의 삶이 윤택해져야 하는데, 그 윤택함은 결국 집의 설계에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지난해 발생한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원전 사고 등으로 고통을 겪은 일본인의 근본적인 삶의 가치관 변화에 따른 프로젝트냐고 묻자 그는 아니라고 했다.
"일본은 이미 수준 높은 미의식과 하이테크놀로지를 보유하고 있어요. 여기에 안정된 경제 기반까지 갖추고 있으니 이미 바뀔 준비가 되어 있던 것이죠."
하우스 비전 전시는 아시아 각국을 돌 때 모두 같은 집을 보여주진 않는다.
"집은 각국의 문화적 배경을 담는 그릇이니, 매번 바뀔 겁니다. 나라마다 미래의 주택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고 제시해나가는 방식으로 해야죠. 지금까지 아시아가 서양의 주거 양식을 그대로 들여왔다면, 이제는 서양 사람들이 '너 한국 집 봤어?'라고 물을 수 있게 하고 싶고, 그럴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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