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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기타'의 존재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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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기타'의 존재 의미

입력
2012.05.10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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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유머 코너에는 입사 면접 질문지라면서 한 장의 사진이 올라왔다. 사진을 보면 면접 대상자가 대학생일 경우 면접원이 할 첫 질문은 "어떤 대학을 다니는가"이다. 선택지에는 번호 순으로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성균관대, 한양대에 이어 마지막으로 '기타'가 있고, 괄호 안에는 그 경우 "정중히 면접을 중단하라"는 문구가 써있었다. 예상하겠지만, 그 게시물 댓글 란은 소위 기타로 분류된 대학의 취업 준비생과는 아예 면접조차 하지 않는 기업세태를 비난 하는 글부터 현재 그런 대학에 다니는 이의 앞날 걱정까지 쭉 이어졌다. 유머 코너에 올려진 게시물이다 보니 그 비판이나 한탄은 심각하기보다는 웃음기 도는 불평에 가까웠다. 또 어딘가 자조적인 톤을 띠었다. 그럼에도 그 말이 우리 대부분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 중 누군가의 꿈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거기서 '기타'는 별 볼일 없고, 더 논할 가치가 없다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 말이 반강제적으로 나와 당신을 그런 식으로 분류하고 평가 절하하기 때문이다.

현재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고 있는 신디 셔먼은 여성이고, 아직 60세도 안됐지만 이미 세계 미술계의 거장으로 평가 받는 현대미술가다. 1970년대 말, 스무 살 중반에 그녀는 할리우드 영화나 유럽 예술영화에 등장하는 흔해빠지고 어딘가 한 군데는 부족해 보이는 여성상을 직접 연기, 촬영한 사진연작으로 일찌감치 남성 중심 서구 미술사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됐다. 흥미로운 점은 '무제 영화 스틸'이라는 제목의 그 시리즈에서 셔먼이 연기하는 여성들이 전형성을 띤다는 것이고, 바로 그 전형성을 특화함으로써 작가의 예술이 유일무이해졌다는 사실이다. 삶이 권태로운 미국 중산층 가정주부, 도시의 불빛을 좇아 가출을 감행한 시골소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넋 놓고 보는 금발여인을 흑백사진으로 재현한 연작은 요컨대 '기타'로 분류되는 여자들을 개별 인격의 초상화로 구현했다. 실제로는 어떤 영화 장면도 베끼지 않은 그 사진작품을 통해 셔먼은 그렇게 사회적 분류법에 따라 사람들의 머릿속에 상투형으로 쪼그라든 여성상에 생생한 얼굴을 부여해줬다.

분류의 마술은 그런 것이다. 분류는 각 개인 및 개체의 존재론적 고유함에 관심이 없으며, 개별 사정에 대해서 무차별적이다. 그런데도 일단 분류가 개시되면 개인이나 개체는 이해관계에 따라 정리되고, 차별적으로 서열화 된다. 분류가 체계적이고 섬세하면 할수록 각 존재에는 긍정(○) 또는 부정(×), 우 또는 열, 주류 또는 비주류, 다수 또는 소수자, 우리 또는 그들 따위의 딱지가 당연한 듯이 붙는다. 어찌나 광범위하고 효과적으로 작동하는지 분류의 틀을 통과하고 나면 각자는 마술처럼 선택지 중 하나가 되고, 그 중 아마도 한 경우는 반드시 기타로 축소된다. 운명처럼. 예컨대 위에 예를 든 입사 면접서의 대학을 분류하는 문항은 운 좋게 통과하더라도, 나나 당신에게 다른 질문들이 주어질 경우를 생각해보자. 불행하게도 우리 각자는 분명 어느 하나에서는 기타라는 항목 속으로 빨려들 것이다. 혹자는 자산 규모를 묻는 문항에서, 혹자는 직업을 묻는 질문에서, 또 혹자는 성(性)적 지향이나 정치적 성향을 분류하는 선택지에서.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기타로 분류될 인자를 공평하게 나눠 갖고 있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나간다. 앞서 괜히 운명이라든가 운이나 불행을 들먹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타'로 평가 절하될 사람들인 것이 아니라, 임의적이거나 심지어 자의적으로 설정된 어떤 기준에 따른 분류가 우리를 그런 것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셔먼의 작품이 보여주는바, 기타는 사실 여하한 범주화에도 녹아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아있는 우리 각자의 개별성이다. 그 개별성은 존재의 수만큼 많아서 누군가의 맘대로 재단하거나 등위 매길 수 없다.

강수미 미술평론가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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