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18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유족들에 의해 사자(死者)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된지 631일 만인 9일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 검찰에 출석했다. 이로써 끊임없이 논란을 빚어온 조 전 청장의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발언의 진위 여부도 곧 판가름나게 됐다. 기소 또는 불기소, 양자택일이 될 검찰의 처리 결과에 따라 정치적 파장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이날 오후 1시50분쯤 에쿠스 차량을 타고 서울중앙지검에 나온 조 전 청장은 차명계좌와 관련된 기자들의 질문에 반복해서 "검찰 조사를 받기 전에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만 답했다. 그는 "부적절한 발언 때문에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유족분들께 심려를 끼쳐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힌 뒤 조사실로 향했다.
경찰은 이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청사 주변에 1개 중대 경력을 배치했다. 그러나 청사 1층 출입구 쪽에 30여명이나 되는 사복경찰을 배치하고, 조 전 청장이 차량에서 내리자 현직 경찰 간부가 문을 열어주고 밀착 경호를 하는 등 전직 경찰청장에 대한 예우를 넘는 행동을 보여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검찰의 대표적 장기 미제였던 이 사건은 조 전 청장 소환 조사를 기점으로 사건 처리를 위한 기본적 절차는 모두 끝내게 됐다. 이제 "노 전 대통령, 뭐 때문에 뛰어내렸습니까? 뛰어버린 바로 전날 계좌가 발견됐지 않습니까? 차명계좌가…"라는 2010년 3월 조 전 청장 발언의 진위 여부 판단만 남은 것이다.
조 전 청장은 이날 검찰에서도 "발언 내용은 사실"이라는 기존 입장을 반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자명예훼손죄의 경우 사실을 말했을 때는 처벌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본인의 주장을 강력히 피력했지만,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별도 자료는 제출하지 않았다. 검찰도 이날 조 전 청장이 해당 발언을 한 것이 사실인지 여부 등 기초 사실관계만 파악한 뒤 돌려보냈다. 검찰은 조만간 조 전 청장을 한 차례 더 소환할 계획이다.
조 전 청장은 7시간 30여분 만인 이날 밤 9시25분쯤 조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노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을 한 사실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이나 유족분들에게 많은 심려를 끼쳤기 때문에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과연 차명계좌는 존재할까. 3년 전 노 전 대통령 수사를 진행한 대검 중수부는 노 전 대통령 서거와 함께 수사를 중단하고 기록을 봉인, 외부에서는 그 실체를 알기 어렵다. 이 때문에 갖가지 추측이 무성하다. 당시 중수부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노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에게 100만 달러, 아들 건호씨에게 500만 달러, 딸 정연씨에게 40만 달러를 건넸다"며 "다만 피의자(노 전 대통령)가 목숨을 끊어 더 이상 수사 진행이 불가능하다"며 '공소권 없음'으로 내사 종결했다. 차명계좌 존재를 언급한 적은 없지만 '돈의 종착지는 가족들이 아닌 노 전 대통령'이라는 게 당시 검찰의 판단이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돈 전달 과정에서 당연히 차명계좌를 이용하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 어느것 하나 명확하게 사실로 드러난 것은 없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고, 갑작스런 서거로 검찰 역시 명확하게 실체 규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차명계좌는 보는 시각에 따라 실제 계좌주의 것인지 타인의 것인지 달리 판단할 수도 있다.
이 같은 변수들이 있지만 검찰은 조 전 청장 사건 처리를 위해서는 '노 전 대통령의 금품 수수 여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차명계좌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 결론을 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문제는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정치적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검찰이 조 전 청장을 기소할 경우 '차명계좌는 없다'는 공식적 인정이 되고, 친노세력의 강도높은 정치적 공세는 예정된 수순이다. 반대로 조 전 청장을 불기소할 경우 '차명계좌는 있다'는 것이 되고, 보수세력은 이를 친노세력을 공격하는 무기로 삼을 게 뻔하다. 이 사건이 어떤 방식으로 종결되든 또 다른 불씨가 된다는 것이다.
권지윤기자 legend8169@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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