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타운에 있는 방문자 안내소에서 얻은 가이드북 3쪽. 눈부신 해변 사진을 배경으로 나열된 목차 옆, 도시를 소개하는 본문의 첫 문단은 이렇게 시작됐다. '비치 보이스(Beach Boys)의 CD를 스테레오에 꽂아요! 출발하기 전에.' 닥치고 즐거워질 준비를 하란 말씀. 센스 있다. 차가운 코카콜라 캔을 땄을 때의 기포 같은 기대가 뽀글뽀글 솟아 올랐다. 태평양의 동쪽과 미국 대륙의 서쪽과 라틴 세계의 북쪽이 겹치는 이 도시의 이름은 샌디에이고(San Diego). 태양은 야자수 꼭대기에 걸린 새파란 하늘과 끝이 보이지 않는 우윳빛 모래 해안을 모두 증발시켜버릴 듯 타올랐다. 거짓말처럼 공기는 선선했다. 태평양을 건너서 따라온 우줄우줄한 일상의 우울이 바싹 말라서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투명한 태양과 해변, 천국보다 낯선
4월의 마지막 주. 샌디에고의 공기는 미안할 정도로 투명했다. 가슬가슬한 서북풍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기온은 섭씨 18도 안팎, 습도는 대략 70%. 천국이라는 곳에도 백엽상이 설치돼 있다면 아마 비슷한 데이터를 보내오지 않을까. 더없이 맑고 쾌적한 날이었다. 그런데 이 동네 사람들은 "칠리(chilly)", 춥다고 했다. 해양성 기후를 보이는 이곳의 연중 기온은 섭씨 20~25도. 계절에 따른 변화가 거의 없이 온화하다. 새벽에 살짝 빗방울이 떨어졌던 이날은 추운 편에 속했다. 강수량은 건조한 캘리포니아에서도 가장 적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요컨대, 이 도시의 가장 큰 매력은 '낙원성' 기후다.
미국의 대표적 휴양도시인 만큼 샌디에이고의 해변엔 리조트와 호텔, 공원이 줄지어 있다. 번잡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백사장의 길이가 무려 112㎞에 이르고, 여러 이름을 단 해변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구획돼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전차처럼 생긴 트롤리를 타고 코로나도로 갔다. 고급 주택과 휴양시설이 모여 있는 지역이다. 가이드북의 초장을 차지할 만큼 우아하고 화려한 분위기였다. 가까이 공군 기지가 있는지 전투기가 부지런히 뜨고 내렸는데, 그것조차 장식으로 보일 만큼 여유가 흘렀다. 하지만 바라던 낙원의 모습은 아니었다. 택시를 잡았다.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달라고, 더듬거리는 영어로 주문했다.
오션 비치, 퍼시픽 비치, 라 호야 비치 등등 여러 해변 중에 택시가 멈춘 곳은 미션 비치였다. 내륙으로 옴팍 파인 미션 베이(Mission Bay) 쪽은 리조트의 사유지, 반대 태평양 쪽은 공공 해수욕장인 듯했다. 선글라스를 삐딱하게 쓰고 해수욕장 쪽을 향했다. 그곳에서 보았다. 자유분방 용왕매진 오만무도 질풍노도 흔희작약하는 젊음의 풍경. 살천스러운 경쟁에 내몰린 한국 젊은이들에게선 보기 힘든 표정이, 거의 나체로 서핑보드를 들고 걷는 아가씨의 웃음에, 따끈한 아스팔트 위에서 잠을 청하는 청년의 얼굴에 담겨 있었다. 카메라의 렌즈를 밝은 망원으로 바꿔 끼웠다. 캘리포니아에서 낙원의 풍경을 담아가야 한다면, 그건 고급 리조트가 아니라 이 허름한 해변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샌디에이고, 멕시코보다 더 멕시코다운
샌디에이고는 본래 멕시코 땅이었던 캘리포니아의 발상지다. 1542년 스페인 탐험가 후안 로드리게즈 카브리요가 이 땅을 밟은 뒤, 여러 세대에 걸쳐 라틴 문화가 쌓여 오늘의 샌디에이고가 됐다. 1769년 가톨릭 교회가 세워졌고 교역항이 되었다. 1848년 미국과 멕시코의 전쟁 이후 미국 땅으로 편입됐지만, 쓰는 말도 먹는 음식도 사람들의 얼굴도 아직 멕시코에 훨씬 가깝다. 매콤한 음식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운타운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의 올드타운은 거의 멕시코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1821년부터 1872년까지 건축된 건물들이 남아 있어 캘리포니아의 옛 모습을 느껴볼 수 있는 장소다. 대장간과 학교, 여인숙 등이 무척 이채롭게 다가왔다.
다시 낡은 전차 같은 트롤리(엔진은 신형 디젤이다)를 타고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복판에 있는 개스램프 쿼터(Gaslamp Quarter)에서 내렸다. 옛날 가스로 가로등을 밝힌 지역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데 100년 이상 된 극장과 술집, 레스토랑 등이 밀집해 있었다. 민속촌 같은 올드타운보다는 이곳이 더 마음에 들었다. 19세기 빅토리아 양식의 건물에 들어선 상점들은 이탈리아, 아일랜드 등 여러 유럽 국가의 분위기를 흉내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바닥에 흐르는 멕시칸의 분위기를 감출 순 없었다. 그것을 감지해내는 건 무척 유쾌한 경험이었다. 한껏 멋을 낸 서울 강남의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한글이 새겨진 식기를 발견했을 때의 고소함 같다고나 할까.
샌디에이고에서 멕시코 국경까지는 25㎞에 불과하다. 멕시코의 국경도시 티후아나를 하루 안에 둘러보고 올 수 있는 거리다. 멕시코 쪽으로 넘어갈 때는 비자 검사가 없지만 돌아올 때는 입국 절차가 무척 까다롭다. 한 떼의 관광객들이 데낄라를 마시며 왁자하게 '당일치기 여행(Day Trip)'을 嫄銖構?있었다. 그 틈에서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를 떠올린 건, 역시나 태평양을 건너서까지 따라온 청승 때문일 게다. 당일치기로 가능한 그 여행이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의 르포에선, 가난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멕시코인들의 목숨을 건 여정으로 그려진다. 처절한 여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레스토랑의 까무잡잡한 종업원에게 팁을 건네며 슬며시 고향을 물었다. 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네 생각과 다를 걸, 아미고(Amigoㆍ친구)." 그는 아랍에서 온 친구였다.
■ 여행수첩
●한국에서 샌디에이고로 이어지는 직항편은 없다. 샌프란시스코나 로스앤젤레스에서 국내선 항공을 이용하면 된다. 공항은 다운타운에서 약 3㎞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하루 10편씩 기차(암트랙)가 왕복한다. 자동차로 가면 약 2시간이 걸린다. 시내 대중교통이 잘 정비돼 있다. ●발보아 공원과 시월드(Sea World)가 유명하다. 다운타운 북동쪽에 있는 발보아 공원에는 1874년 문을 연 자연사박물관, 스페인 회화가 특색인 샌디에이고 미술관, 세계적 규모의 동물원 등이 모여 있다. 시월드에서는 범고래 쇼를 볼 수 있다. 샌디에이고 관광국 www.sandiego.org 캘리포니아관광청 한국사무소 (02)777-6665.
샌디에이고=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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