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 경선 사태로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당권파의 핵심 세력인 경기동부연합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경기동부연합은 구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정파로서의 존재를 인정 받고 있었다. 하지만 당권파 관계자들도 조직의 실세로 지목된 비례대표 2번 이석기 당선자에 대해선 "비례대표 후보 등록 전까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인물"이라고 입을 모으는 것은 경기동부연합의 폐쇄성을 드러낸 단적인 사례다.
경기동부연합의 뿌리
경기동부연합의 실체에 접근하려면 과거 운동권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경기동부연합의 모태는 1991년 결성된 민족해방(NL) 계열 운동권의 전국조직인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이하 전국연합)이다. 당시 전국연합의 하부 지역 조직으로 경기동부연합, 광주ㆍ전남연합, 인천연합, 울산연합 등 8개의 조직이 있었다. 이 가운데 경기동부연합의 주축은 성남ㆍ용인에서 활동하던 학생ㆍ노동ㆍ청년운동 세력이었다. 전국연합은 1997년 대선 당시 공식적으로'국민승리21'권영길 후보의 선거운동본부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지만 경기동부연합, 광주ㆍ전남연합, 울산연합 등 다수는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를 지지했다.
민주노동당 입당과 장악
전국연합이 98년쯤 사실상 와해된 뒤 NL 계열은 2001년부터 민중민주(PD) 계열이 주도한 민주노동당에 합류한다. 10년 내 자주적 민주정부 및 연방통일 조국 건설을 목표로 제도권 정치 참여를 선언한 2000년의 '군자산의 약속'이 배경이 됐다.
NL 계열은 PD 계열이 주류였던 민주노동당에서 지역위원회를 장악하면서 세를 확장해 갔다. 그 배경에는 경기동부연합과 학생운동 세력과의 끈끈한 관계가 한몫을 담당했다. 학생운동권은 90년대 말 이후 현저히 침체됐으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내 강경파였던 경기동부총련은 경기동부연합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인력을 수급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성남ㆍ용인에서 활동한 서울대ㆍ한국외국어대 출신 운동권 인사들이 경기동부연합에 다수 편입하는 계기가 됐다. 이석기 당선자 역시 한국외대 용인캠퍼스 출신이다.
경기동부연합을 포함한 NL 계열은 2004년 5월 당 대회에서 PD 계열을 누르고 당권을 잡는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위장전입과 당비 대납, 불법 지구당 창당 등의 불법 행위들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이후 NL 계열 내부에서도 주도권 다툼이 벌어졌다. 당초 울산연합과 인천연합 세력이 우세했으나 2006년 1월 경기동부연합이 광주ㆍ전남연합과 손잡고 '범경기동부연합'으로 거듭나면서 당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조직의 주요 인사 및 배후
비례대표 경선 이후 이석기 당선자는 경기동부연합의 핵심 인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 관계자는 "배후 조직이 이 당선자를 공개 무대에 내세우기로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당권을 장악한 경기동부연합의 숙원 사업은 국회의원 배출이었다"고 말했다.
성남 중원에선 경기동부연합 출신인 윤원석 '민중의소리' 대표가 성추행 전력으로 낙마한 뒤 같은 경기동부연합 출신인 김미희 후보가 출마해 당선됐다. 서울 관악을에서도 서울연합 출신으로 경기동부연합과 가까운 이상규 후보가 출마해 당선됐다.
숨은 실세로는 경기동부연합의 1세대 지도자로 꼽히던 이용대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 정형주 전 민주노동당 경기도당 위원장 등이 거론된다. 특히 이 전 의장은 2007년 이른바 '일심회' 사건 판결문에도 자주 나온다. 당시 사건에 연루된 장민호씨는 2005년 12월 북한에 보낸 통지문에서 "당 정책위를 완전 장악하도록 해야겠다"면서 "정책위원장으로 경기동부의 이용대를 내세우고…"라고 했다. 경기동부연합의 이론가였던 이 전 의장은 뇌출혈로 투병 중이다.
또 다른 배후로는 김영욱 전 진보정치연구소 부소장이 거론된다. 당 관계자는 "김 전 부소장이 경기동부연합의 핵심 전략가였으나 2005년 이후 권력 다툼에서 밀려 보이지 않다가 최근 다시 등장했다"고 말했다. 김 전 부소장은 경기동부연합 출신 이석기 당선자의 보좌진 명단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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