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체가 문드러지고 조각난 돌부처들이 흩어져 있는 전남 화순의 운주사는 여전히 오월 광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순례지다. 사찰이 자리한 천불산 일대의 수많은 돌부처와 탑들, 이른바 '천불천탑'의 온전치 못한 형상은 광주 금남로에서 죽어간 가족과 친구로 다가와 살아남은 자들을 위무한다. 이곳은 광주에 피바람 불던 시절, 희생자 염하는 일을 자청한 황호걸씨(당시 고교 3년)가 관을 짤 나무를 찾으러 왔다 계엄군에게 총살당한 한 맺힌 현장이기도 하다.
사진작가 노순택(41)씨가 1980년 5ㆍ18 민주화운동의 현장 광주와 그곳에서 20km 떨어진 화순 운주사를 카메라에 함께 담아온 연유다. 2005년 5ㆍ18기념재단 사진작가 공모 선정을 계기로 시작한 작업이 벌써 햇수로 7년째. 노씨가 5ㆍ18에 즈음해 그간의 작업을 처음으로 꺼내 들었다. 사진집 <망각기계> (청어람미디어 발행)로 엮고 이중 60여점을 추려 6월 10일까지 서울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 신관에서 '망각기계' 전을 연다. 망각기계>
1층 전시장에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혼령 같은 흑백의 영정사진이다. 1997년 새 묘역 이장 후 비바람에 훼손돼 희미하게 형체만 남은 망월동의 영정사진을 다시 촬영한 것. 사진에 어떤 추가 작업도 하지 않았다는 노씨는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질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마저 풍기는 사진은 잊혀져 가는 그날에 대한 은유로 다가온다.
화석화하거나 왜곡돼 소비되는 역사의 현장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묘소 앞에 쭈그려 앉아 오열하는 노모를 경쟁하듯 카메라에 담는 미디어, 소총을 들고 오월 항쟁의 시민군 체험을 하는 기이한 풍경, 기념촬영을 위해 마련한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이 붙은 입간판까지.
"1980년 당시 광주는 외부와 단절된 섬과 같았죠. 김원중씨의 노래 '바위섬'이 광주를 의미했던 것처럼요. 잔혹한 군사독재가 끝나고 희생자도 명예를 회복했지만 그 후로도 대추리 무력진압, 한진중공업과 쌍용자동차, 그리고 제주도 강정마을 사태 등에서 국가의 폭력성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이 정권들이 광주의 피울음을 삼키며 탄생한 권력이 맞는가 싶지요."
작품 가운데는 화순 운주사에 긴 몸을 뉜 미륵불도 있다. 석가모니 이후 중생을 구제하러 온다는 미래의 부처로, 이 와불이 일어서는 날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믿음이 민중 사이에 전해진다. 그 옆에 토끼풀밭에 길게 누워 잠든 한 남자의 사진이 나란히 걸렸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언제 깰 지 모를 와불이 아니라, 언제든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산 자의 몫이라고 넌지시 말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전시가 오월 항쟁의 추모 전시만은 아니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날'에 대한 망각은 결국 반복되는 폭력을 승인하겠다는 게으른 의지 표명 아닐까요?" (02)739-4937~8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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