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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1. 이신통을 찾아서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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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1. 이신통을 찾아서 <27>

입력
2012.05.07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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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친정 가는 아낙네 모양으로 무명 저고리에 감물 들인 치마에 허리끈 두르고 때가 덜 타는 회색 장옷을 쓰기로 하였다. 안 서방이 세마를 끌고 왔는데 하나는 내가 타고 갈 것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짐과 부담을 싣고 갈 작정이었다. 새벽에 길을 떠나 연산 지나고 전라도 경계의 진산까지 하룻길이지만 저녁녘에 대둔산 북녘인 방고개를 넘는 것이 불리하다 하여 연산 어름에서 첫날을 묵기로 했다. 안 서방이 수년간 장삿길로 나다닌 행로여서 무주까지 가는 길이 그이 손바닥 안에 들어있는 것 같았다.

신통이란 놈 덜미를 잡아끌구 오든지, 그리 못 하겠으면 토굴이든 절간이든 주질러 앉아 살아버려라.

엄마가 그때만 하여도 기운이 아직 펄펄하여 처음에는 이 서방을 빌어 딸에게까지 미운 기운을 뻗치더니, 아예 내가 상단을 따라나서게 되자 방자를 사서 소식을 보내오기도 하였고, 드디어는 호열자가 돌던 그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아무튼 세마를 탔겠다 안 서방이 견마를 잡고 부담마는 고삐를 앞 말에 매어 뒤따르게 하였으니 누가 보더라도 부부 상고나 친정 나들이 가는 살 만한 집 아낙으로 보였을 것이다. 진산 거쳐서 금산에 당도하니 산천경개 유람 다니는 격으로 천천히 사흘 길이 되었다. 금산에서 무주가 지척이라 점심참에 행선지였던 도인의 집에 당도했는데, 나지막한 돌각 담에 제법 포실해 뵈는 이 칸통 겹집 초가로 마당 한편에 엇갈려서 길게 까대기 헛간이 보였다. 말방울 소리가 들리자 아이가 먼저 마당으로 쪼르르 뛰어나왔고 안 서방이 외쳤다.

주인장 계시오?

헛간에 온 가족이 들어앉아 있었는지 주인과 아낙과 딸이 흙벽 위로 나란히 머리를 내밀었다. 식구들은 모두 안 서방을 알아보았다. 두 양주가 우리를 맞아 마루 위에 오르기를 청하였고 서로 간에 인사를 나누었다. 안 서방이 나를 계수씨라 부르면서 이신통의 아내라고 소개했고 주인은 앉은 채로 반절하고 말했다.

배 서방이라 하오. 누추한 곳까지 오셨구먼요.

바쁘신 중에 신세를 지게 되어 송구합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배 서방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이제 나락도 털었으니 농사일도 다 끝났고 지금은 온 식구가 잡물 공방 일로 소일하고 있지요.

모녀는 대나무를 깎아 참빗 면빗 등속을 만들고 배 서방은 덩굴로 맷방석이니 채반이니 멱서리를 만들어 겨우내 모자란 가용을 보태는 중이었다. 내가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여기 찾아온 것은……

배 서방이 내 말을 중동무이했다.

한 굴에 든 여우도 들고 나는 구멍이 따로 있다고, 어찌 그리 엇갈립니까. 닷새 전에 우리 집서 묵고 갔지요.

나는 전처럼 마음을 태우거나 심하게 낙망하지 않았다. 먼발치서 이 집을 바라보면서 어쩐지 그를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터였다. 나직하게 내려앉은 초가지붕 위로 가을 햇살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건만 내가 못 견디게 기쁠, 제 눈시울이 번쩍할 정도의 광채는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어디로 간다고 말은 합디까?

민망했던지 안 서방이 나를 연신 돌아보며 말했다.

고향으로 간다구 하든가…… 여보 이 서방이 어디루 간다구 그랬소?

머 보은이라나, 그랬던 거 같은데요.

나와 안 서방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으니, 그래도 보은이라면 옥천 지나 잠깐이었고 무엇보다도 행방이 뚜렷해서 다행이었다. 마루 안쪽에 큰방이 있고 다른 지방에서는 왼편에 안방이 있을 자리건만 바로 부엌이고 마루 오른편에 작은방이 있었다. 온 식구가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데 쌀 섞인 서속밥에 산나물 서너 가지와 우리가 내놓은 굴비와 새우젓도 있었다.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비린 것에 달려들었지만 우리는 더덕과 고사리와 장맛에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시름겨운 행로에 밥은 잘도 들어갔고 야속하다는 생각도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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