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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그래요 아버지, 그렇게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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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그래요 아버지, 그렇게 하면 돼

입력
2012.05.07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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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균형'이라며 평생 야당을 지지해 온 아버지가 대통령으로 여당 후보를 찍었다고 했을 때, 칠순의 아버지를 처음 '늙었다'고 여겼다. 늙음과 보수는 정말로 등가인가, 속으로 탄식했다. 심지어 TV를 보시다가 대통령이 나오면 노안에 흐뭇한 표정이 스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우리랑 동갑인데…'라며 혼잣말을 하셨다.

퇴직 후에는 평일에도 등산을 즐기던 아버지가 언제부턴가 집안에만 계셨다. 혼자 산에 갔다 발을 접질리는 통에 밤늦도록 어렵게 하산을 한 이후부터였다. 한때 북한산 도봉산은 물론이고, 경기 명산 100을 반 이상 해 낸 아버지였는데…. 왜 혼자 산에 가시냐며, 볼멘소리를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산에 함께 다니던 친구 몇은 세상을 벌써 떴고, 다른 친구들은 이제 산에 오를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늙음을 인정한 순간이었다. 마음자리가 서늘했다. 오랜 정치적 소신이, '동갑'이라는 이유에 자리를 내 준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운을 내실까 싶어 라는 3권짜리 노년의 여행자 책을 사드렸는데, 1권을 읽고는 더는 그만이다. 눈이 침침하다는 게 이유였다. 나중에 늙으면 책이나 실컷 봐야지, 했던 내 생각이 철없음을 깨달았다.

이제 아버지의 유일한 소일거리는 인터넷이다. '앉아서 천리를 간다'는데, 주로 게임장기만 두신다. 하루는 컴퓨터로 장기를 두던 아버지가 벌컥 방문을 열고 나온 적이 있다. 낯 모르는 상대와 실시간 장기를 두는데, 아버지가 장기 알을 좀 늦게 내려놓은 모양이다. 상대편에서 '빨리해 꼰대'라고 채팅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마음이 떨려, 게임방에서 나오는 것도 서둘러지지 않았던 아버지는 컴퓨터 코드를 뽑아버리는 것으로 그 황망함으로부터 벗어났다. 나중에는 아예 장기 아이콘을 휴지통에 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바탕화면에 같은 아이콘이 다시 깔려있었다. 아버지의 박약한 결단력을 엿본 것 같아, 슬쩍 웃음이 났다. 자식들 앞에서 지나치리만큼 당당하게 본인을 앞세워 온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애들처럼 저리 컴퓨터 게임만 한다'는 친정 엄마의 타박도 못들은 척했다.

인터넷 안에는 사이버세상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고, 그 안에 네이버라는 집이 있다. WWW ~는 그 집의 주소다. 그 집에 들어가려면 우리집 문을 들어올 때처럼 비밀번호를 눌러야 한다. 아이디라는 암호를 대는 것이 좀 성가실 뿐이다. 그 집에 들어가면 편지함이 있다. 그것이 이메일이다… 이런 식으로 아버지에게 이메일을 가르쳐드렸다. 그러자 이메일을 보내놓고, 곧 바로 '메일 보냈다 열어봐라'하고 전화를 해오셨다. 갑자기 잦아진 아버지의 전화가 모두 그 내용이었다. 한자가 뒤섞인 글은 '시련을 건너는 법' '부부간의 예' 등 교훈적인 것에서부터 손녀의 글짓기를 그대로 옮긴 것 등 다양했다. 내가 무슨 성파 몇 대 손, 어떤 항렬인지가 촘촘히 담겨있기도 했다.

한동안 무척이나 재미를 보이셨는데, 비슷한 횟수로 이메일 사용법을 잊어버렸다. 퇴직 무렵의 직함이 이사여서, 아직도 '박이사님'이라는 호칭이 익숙한 아버지가 이렇게 무력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이메일에 사진을 첨부하는 방법도 알려드렸었다. 그 뒤로도 알려드렸고 또 그 뒤로도…. 과장하자면 백 번은 알려드린 것 같다. 전화로도 수 차례였고, 어쩌다 주말에 친정에 가면 거개의 시간을 거기에 썼다. 결국 몇 번을 가르쳐드렸는데 그걸 모르느냐며 다시금 볼멘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그때 혼나는 어린아이처럼 수그러들던 아버지 때문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혼자 울음을 터뜨렸다.

지난 주말에 친정에 갔다. 사진 첨부하는 법을 처음인양 다시 알려드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숙제를 내드렸다. 매일 하나씩, 딸에게 사진 보내기…. 천안문을 배경으로 엄마와 찍은 삐뚜름한 여행 사진, 딸보다 더 가까이 사는 손녀 사진 등 예전에 찍은 사진들을 하나씩 보내오더니, 오늘은 새로 찍은 마당의 텃밭 사진을 보내오셨다. '그래요 아버지, 그렇게 하면 돼.' 어릴 때 아버지가 내게 하던 말을, 이제 내가 아버지에게 한다.

박미경 갤러리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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