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소녀의 이미지는 찾기 힘들었다. 대신 원숙미가 느껴졌다. 결혼한지 7년 된 유부녀 역할을 맡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아니면 못된 짓을 한 남편을 끌어안는, 감정의 기복이 심한 연기를 무난히 치러내서였을 수도. 올해 서른 셋이라는 나이가 소녀의 모습을 지웠는지도 모른다. 조근조근 차분하게 속내를 전하는 말투는 그대로였다. 아니, 좀 더 단단해진 듯했다. 6일 오후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임수정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낯익었다.
임수정은 17일 개봉하는 '내 아내의 모든 것'(감독 민규동)에서 유별난 유부녀 정인을 연기했다. 일본에서 요리학교를 졸업해 못하는 요리가 없고, 아름답기까지 하지만 남편 두현(이선균)에겐 지옥 같은 아내다. 입에 모터가 달린 듯 자기 속내를 끊임없이 토해내는 정인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개성이 두드러진다. 담배를 냉장고에 넣어뒀다 피고, 얇은 셔츠에 팬티 바람으로 집안을 활보한다. 그런 정인의 유난스런 행실을 견디지 못한 두현은 이혼의 빌미를 잡기 위해 옆집 카사노바 장성기(류승룡)에게 아내를 유혹해달라고 부탁한다.
독설을 쏘아대는 정인이 성기의 노련한 접근에 마음이 흔들리고 두현이 질투의 화염에 휩싸이면서 영화는 예측불허의 소동극을 연출한다. 별스런 캐릭터들이 힘겨루기를 하며 독특한 에피소드를 만들어가는 이 영화에서 임수정은 한껏 물오른 연기로 스크린의 무게 중심을 잡는다.
무엇보다 관객의 귀가 채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빠른 정인의 속사포 대사가 인상적이다. 관객이야 즐겁지만 임수정은 "대사 때문에 NG도 많이 나고 어려움도 많았다"고 말했다. "시나리오에 있는 대로 단어 하나 빼지 않고 연기했는데 일부 편집된 대사가 있어 억울하다"고 할 정도. "감독님은 대사가 맛깔나게 전해지는데 신경을 쓰셨고, 저는 빡빡한 대사 속에서도 감정을 보여주려 애썼어요."
정인 역할은 임수정이 선호하는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해서 만들어가는 자율적인 연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정인을 매력적으로 만들어주겠지, 하며 감독님에 대한 신뢰에 의지했다"고. 그는 "촬영 중에 종종 앞뒤 장면을 점검하며 다른 배우와의 호흡도 생각하는 게 제 스타일인데 이번엔 아무 계산도 않고 감독님에게 나를 맡겼다"고 했다.
"정인은 저랑 많이 달라요. 관객을 설득하기 위해 제 것으로 만드는 게 참 힘들었어요. 그래도 예스, 노가 분명하고 가식적인 말 잘 못하는 건 저랑 많이 닮았죠. 경험해보지 못한 유부녀 연기는 유부남인 이선균 류승룡 두 선배가 많은 조언을 해줬어요. '이게 맞나?' 할 때마다 현장 스태프들이 '내 아내도 그래'라며 확신을 주기도 했고요."
"기존 연기의 틀을 깨기 위해 정인을 선택했다"는 임수정은 "다음 작품으로 공포나 스릴러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에로틱한 영화나 치정극 등 출연 제안 작품의 폭이 넓어져 다행"이라고도 했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은 임수정에게 뜻하지 않게 새로운 삶의 재미를 안겨줬다. 강릉의 카페에서 성기와 정인이 만나는 장면을 찍으면서 커피의 맛에 푹 빠져든 것. 그는 "일주일에 한번 강릉에 가서 (바리스타)과정 수업을 듣고 있다"고 했다. "4년째 심리학에 빠져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공연장과 미술관 다니느라 개인 일정이 더 바쁜" 임수정에게 고급스런 새 취미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어려서부터 인간의 내면이 궁금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심리학 철학 책을 한번에 열 권 정도씩 쌓아놓고 읽어요. 그런 책 읽고선 사람들 고민 들어주며 상담하다 보면 자연스레 제 마음도 치유돼요. 카운슬링 카페 차려도 되겠다고요?(웃음)"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