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급 공무원시험 준비를 위해 3년 동안 까다로운 행정 관련 대학 전공 과목 공부에 들인 돈과 시간, 노력이 내년이면 다 허사가 될 판이에요."
지난 3일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학원가에서 만난 9급 일반행정직 공채시험 수험생 박모(27ㆍ여)씨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내년부터 바뀌는 공무원시험 때문이다. 박씨는 "고교 졸업자의 공직 진출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과목을 개편한다는데, 그러면 나처럼 몇 년씩 시험에 매달리고 있는 대졸 수험생들은 어쩌란 말이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말 행정안전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고졸 출신의 공직 진입 장벽을 낮추라"고 지시한 뒤 행안부가 관련 법 개정에 나서자 기존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수험생들의 불만이 팽배해지고 있다.
행안부는 지난달 13일 내년 9급 공채부터 행정학과 행정법, 형법, 세법 같이 대학에서나 배우는 직군별 필수 과목들을 선택 과목으로 돌리고, 고교 과목인 사회, 과학, 수학 등을 선택 과목에 추가하는 내용의 '공무원 임용시험령'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고교 과목만 배웠어도 9급 공채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그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온 수험생들은 "역차별"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달 13일 개설된 정부의 국민 신문고 홈페이지 '전자 공청회' 게시판에는 찬반 논란글이 1,700여개나 올랐다. 한 수험생은 "공무원시험 경쟁률을 줄이는 데 노력해야 할 정부가 되레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며 불만을 털어놨다. 다른 수험생도 "개정안이 시행되면 회계를 모르는 세무직과 형법을 모르는 검찰직 등 전문성을 상실한 공무원들이 양산돼 결국 국민들에게 불편을 끼치게 될 것"이라며 공무원의 수준 저하를 우려했다.
물론 "어렵사리 한 전공 과목 공부가 아까워 매년 시험에 도전하다 '고시낭인'이 되는 사회적 비용을 줄일 필요가 있다" "학원에 가 몇 개월씩 수강료 내고 행정학 같은 과목들을 배우지 않고도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니 좋은 방안"이라며 정부 방침에 손을 들어주는 찬성 쪽 수험생과 학부모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기존에 시험공부에 매진하던 수험생들의 반대가 많았다.
행안부는 "9급 공채시험 과목에 대학 수준의 전공 과목이 포함돼 있어 고교 출신은 응시조차 어려운 현재 상황을 개선할 목적으로 충분한 토론과 검토를 거쳐 개편안을 마련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온라인 의견수렴용인 '전자 공청회' 게시판만 만들었을 뿐 관련 공청회는 연 적이 없다.
이러다 보니 졸속 추진 비판도 나온다. 세무직 수험생인 윤모(34ㆍ여)씨는 "정부는 전문 지식이 요구된다는 이유로 내년부터 세무직 9급 시험에 정부회계를 새로 포함시켰으면서 이번에는 대통령 눈치를 보느라 말을 뒤집고 고교 과목만 선택해도 임용될 수 있게 하는 모순을 범했다"고 꼬집었다.
임도빈 서울대 행정학과 교수는 "정부의 공무원 시험 과목 변경은 명백한 오판"이라며 "하급직도 상식만으로 민원인을 상대할 수 없는 행정 전문화 시대가 된 만큼 전문 지식이 준비된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기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장도 "시험 과목을 공무 수행과 상관 없는 고교 과목으로 바꾸는 것보다 합격자의 일정한 비율을 고졸 학력자의 몫으로 할당하는 '쿼터제' 방식이 더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글ㆍ사진 권경성기자 ficci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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