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H-View/ "나, 길옥윤 같지?" 멋을 불고 추억을 불고… 색소폰에 빠진 중년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H-View/ "나, 길옥윤 같지?" 멋을 불고 추억을 불고… 색소폰에 빠진 중년들

입력
2012.05.04 11:36
0 0

지난 1일 밤. 서울대 음대 공연장의 대연습실. 강사가 손뼉을 치자 멋드러진 색소폰 소리가 연습실을 가득 채운다. 정신을 집중해 색소폰을 부는 나이 지긋한 수강생들의 볼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롤러를 누르면서 옆으로 밀어야 한다"는 강사의 말에 수강생들 손은 바빠지고, 얼마 못 가서 "어렵다"는 탄식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포기자가 속출한다. "도 샵(#) 과 시를 연속으로 붙여 놓은 작곡가도 있느냐"며 작곡가 탓을 하는 수강생의 애교성 항의에 한 바탕 웃음이 터져 나온다.

수강생들은 다름아닌 12명의 서울대 교수들. 평균 50대 중반을 넘는 중년들이다. 요즘 중장년층 사이에 색소폰 바람이 불고 있다. 한기원(34) 강사는 "최근 중년들 사이에 색소폰 배우기 열풍이 대단하다"며 "색소폰을 가르쳐달라는 교수, 교직원들의 요청으로 서울대 음대에서 지난해부터 특별 강의를 마련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현재 악기 판매량을 근거로 색소폰 인구만 최소 25만 명 수준으로 추산되는데 매년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덩달아 악기상들도 신났다. 국내 최대 악기 전문 상가인 서울 종로 낙원상가에서 40년 가까이 색소폰 전문 매장을 운영 중인 박대식(57) 새음악기사 대표는 "7∼8년 전만 해도 장사가 안 돼 문을 닫을 뻔했던 많은 악기 매장이 색소폰 때문에 다시 살아났다고 말할 정도"라며 "이 곳 매장 중 색소폰을 중심으로 한 금관악기를 다루는 매장이 전체 매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 기타 매장보다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2∼3년 전만 해도 100만원짜리 중고 색소폰을 시장에 내놓으면 50만원 안팎에 팔렸지만 지금은 70∼80만원에 팔린다"며 "과거에는 100만원 이상 고가 제품들만 있었지만 지금은 시장이 커져 100만원 미만부터 700만∼800만원대까지 종류도 다양하다"고 덧붙였다.

나이든 사람들이 뒤늦게 뛰어든 색소폰 공부는 만만치 않다. 장수홍(65) 미대 교수는 "아파트에 사는데 집에서 연습을 하면 식구들 눈치가 보통이 아니다"며 "남들보다 1시간 먼저 출근하거나 맨 마지막에 퇴근하면서 연구실에서 연습한다"고 말했다. 반장을 맡은 서장원(69) 국제대학원 교수는 "매주 화요일 저녁에 모여 2시간 이상 강의도 듣고 연습 한다"며 "악기를 처음 배우는 초보자여서 힘들지만 열정은 대단하다"고 전했다.

중년을 훌쩍 넘긴 이들이 아들 또래 강사에게 지적을 받고, 가족들 눈치를 보며 색소폰 배우기에 열심인 까닭은 무엇일까. 이정재(62) 교수는 "골프, 와인 등 다른 취미도 해봤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 많았다"며 "색소폰은 악기 중 가장 배우기 쉬워서 조금만 배우면 어느 정도 연주가 가능하다"고 했다.

젊은 시절 이봉조, 길옥윤 등 유명 색소폰 연주가들의 선율에 흠뻑 취했던 추억도 색소폰을 편하게 느끼는 이유 중 하나다. 한 강사는 "여러 악기들 중에서 색소폰은 트로트 등 대중 음악도 소화가 가능한 친숙한 악기"라며 "처음에는 클래식으로 시작해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평소에 자신이 좋아하는 대중 음악도 얼마든지 연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동호회처럼 여럿이 모여 색소폰을 배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1970년대 유명작품인 '별들의 고향'을 만든 영화감독 이장호(67)씨가 그런 경우다. 3년 전 지인 20여 명과 기독교 실업인 동호회라는 색소폰 동호회를 결성한 그는 "베이비 부머 세대들이 은퇴를 하면서 무엇이든 새롭게 도전해 보고 싶은 욕구들이 커졌다"며 "특히 평생 악기를 한 번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던 이들이 시간과 돈의 여유가 생기면서 실제 배우기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악기를 배워 봉사활동에 나서는 중년들도 있다. 지난해 말 동료 교수들과 보라매 병원을 찾아 환우들을 위한 연주회를 가진 서장원 교수는 "뛰어난 실력은 아니지만 관객 앞에서 우리의 음악을 들려줄 수 있어서 뿌듯했다"고 밝혔다. 이병기(44) 그래텍 부사장은 "지난해 봄 서울역 앞 노숙인들 앞에서 동호회원들과 연주회를 한 이후 음악의 또 다른 힘을 느꼈다"며 "회사 생활 속에서 지쳐 버린 몸과 마음이 재충전 되고 더 열심히 일 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