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34ㆍ사진) 시인의 첫 시집 <다정한 호칭> (문학동네 발행)에는 바람, 구름, 나무, 사막, 별이 등장한다. 이것들이 전통 서정시의 단골 글감이라며 등단 6년 만에 첫 시집을 낸 시인의 시적 취향을 지레 짐작하면 곤란하다. 시인은 "서정을 담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를 쓰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길을 걸어보고자" 이토록 시적인 소재를 택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다정한>
화려한 수사도, 난해한 비유도 없는 그의 시집은 그러나 고졸한 시어와 남다른 사유 감각이 만나 한국시에서 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질감을 자아낸다. 꼬박꼬박 행갈이 된 시편들은 긴 침묵을 사이사이에 둔 웅얼거림을 닮았다. 때로 자연을 바라보는 몽상가의 상념처럼 느껴진다. '잎은 나무의 수많은 눈꺼풀/ 둥치가 바람에게 말을 걸고 나무의 기억이 흔들린다/ 기억 몇 잎 떨어진다 해도 한 뼘 그늘을 개의치 않을 나무/ 잃어버리다, 잊어버리다'('나무의 눈꺼풀'에서) 어떨 땐 명민한 철학자의 통찰 같다. '어둠일수록 별을 아끼는 이유/ 다가올 문장들이 기록된 문장들의 주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해석에의 동경보다 오독을 즐겨할 것/ 언제일까 스스로 귀를 자를, 문장의 시간'('차갑게 타오르는'에서)
전체 55편의 시 중 여러 편은 '때로 헤어진 줄 모르고 헤어지는 것들이 있다' 같은 아포리즘(을 닮은 시구) 혹은 '누가, 두 귀를 잘라 걸어놓았을까'(여기서 두 귀는 청진기다) 등 순간의 경험과 관찰로 시작한다. 그리고 찰나의 깨달음과 영감으로 붙잡은 실마리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실타래라도 풀 듯 시로 엮어나간다.
새알을 손에서 놓쳤다. 깨진 알에서 '점점의 붉음'을 발견한다. '깨지는 순간 혈흔의 기억을 풀어놓는 것들이 있다'. 생각은 유려하게 번져간다. '날개를 갖지 못한 알 속의 새는 새일까, 새의 지나간 후생(後生)일까' '문득 있다가, 문득 없는 것들을 뭐라 불러야 하나' '새가 되어보지 못한 저 알의 미지는 바람일 것' '바람이 되지 못한 것들의 배후는 허공이 알맞다'('허공에 스민 적 없는 날개는 다스릴 바람이 없다'에서)
이씨는 "시 한 편 한 편 오랜 시간을 들여 쓴다"며 자신의 시가 사유의 산책로가 되길 바란다. "일부러 구어체적으로 쓰지 않는다. 빨리 읽히지 않기 위해 문장을 건조하고 딱딱하게 쓴다. 비문으로 지적 받을 수도 있는, 읽기 불편한 장치를 두기도 한다. 독자가 자기 생각을 충분히 개입시켜 내 시를 읽을 수 있게끔 휴지부를 만들기 위해서다." 등단 5, 6년 안팎의 신세대 시인 여럿 중에서도 그가 왜 가장 주목 받는지 알게 하는 시집이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사진 고영권기자 young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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