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여자농구에 여자 감독이 탄생했다. 구리 KDB생명의 새 사령탑이 된 이옥자(60) 감독. 1998년 한국 여성프로농구 출범 이후 첫 여성 감독이다.
164센티미터의 작은 키로 1970년대 한국 여자농구의 전성시대를 이끌었고 신용보증기금 코치(1982~1989)를 시작으로 지휘부에 들어선 다음에는 숭의여고(1990~1997) 용인대(1998~1999)감독으로 우승가도를 달렸으며 일본에 진출해서는 샹송화장품(2004~2006)의 감독까지 지내며 연속 우승을 일궈냈다. 그런데도 그가 국가대표팀 코치를 마지막으로 2008년 태릉선수촌 지도위원이 되자 다시 농구코트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점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환갑을 맞는 나이에 코트로, 그것도 작년 리그 2위의 강팀 감독으로 돌아왔다.
4대 프로경기 가운데 여성이 감독이 된 것은 2010년 프로배구 GS칼텍스의 조혜정(60) 전 감독이 처음. 4대 프로경기 가운데 두번째, 프로농구 최초 여성감독을 맡는 그의 각오를 들어봤다.
_농구 선수는 당연히 다 키가 큰 줄 알았어요.
"농구에는 다섯 개, 포인트가드 슈팅가드 포워드(공격수) 스몰포워드 센터가 있어요. 저는 포인트가드였어요. 코트 안에서 살림을 하는 게 포인트가드에요. 농구는 재미있는 것이 다섯 명 중에 누구나 다 득점을 할 수 있어요. 농구는 골대가 높으니까 큰사람이 유리하지요. 하지만 작은 사람도 필요합니다. 밑에서 굴러다니는 공은 작은 사람이 다 잡아요."
_그래서 인터셉트를 잘하는 선수로 이름이 높았지요.
"지금처럼 기록이 없어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제가 한 경기에서 7개까지 인터셉트를 한 적이 있어요. 골센스는 큰 사람보다는 나은 것 같아요. 옛날에 방열 선생님(전 농구 국가대표 감독)한테 제가 '5센티만 컸으면 좋겠어요' 했더니 '그러면 이옥자가 아니지'그러시더라고요. 작은 사람도 할 수 있는데 뭐 굳이 큰 걸 원하느냐는 뉘앙스가 기억에 남아요. 국가대표 가운데는 후배주신숙 선수나 전경숙 선수처럼 저보다 더 작은 선수도 있었지만 제가 국가대표 할 때는 12명 엔트리 가운데 제가 늘 제일 땅꼬마였습니다."
_농구는 왜 하게 됐어요?
"제가 남산국민학교를 나왔어요. 회현동 1가 95번지에 살았는데 어릴 때는 정적이라 서예반을 했어요. 그때는 중학교를 시험을 봤는데 저는 진명여고를 가고 싶었는데 어머니가 거기는 사립이라고 학비가 조금 드는 공립인 무학을 가라고 했어요. 그때 아버지가 자영업을 하셨는데 친구들이랑 자주 망하고 그래서 집안이 어려웠거든요. 형제는 또 오빠부터 여동생까지 4남매가 있었으니(남동생이 프로야구 이광은 감독). 시험 발표가 12월말쯤 났는데 엄마가 실망하는 걸 보기가 힘들어서 혼자서 보러 갔어요. 갔더니 이름이 있어요. 효도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요. 학교 교정을 한바퀴 둘러보는데 체육관 같은 게 있어서 빼끔이 문을 열었어요. 농구팀이 연습을 하고 있다가 민혜숙 선배라고 지금은 캐나다에서 갑부가 된 선배가 돌아보더라고요. 가만히 보니까 공을 링에다 던지고 들어가는 게 아주 재미있어 보이는 거에요. 선배가 내일부터 운동화 신고 나오래요.(웃음) 그 길로 집에 가서 엄마한테 말표 농구화만 하나 사달라고 했어요. 다음날부터 농구화 신고 시작했어요. 2학년부터는 선수로도 뛰었어요. 농구는 익히는 데 좀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공하고 나하고만 관계가 있는 게 아니라 수비자가 있어서 이걸 떨어뜨릴 줄 아는 묘미를 알아야 하는데 그걸 알려면 시간이 걸리거든요. 그래서 보통 중학생은 3학년은 되어야 선수를 하거든요. 고등학교를 갈 때가 되어서 보니 사립인 숭의여고가 워낙 농구를 잘하는 곳인데 여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어서 두 말 않고 숭의여고로 갔지요."
_숭의여고야 당시 무적이었지만 무학여중도 농구가 늘 1등이었습니까?
"제가 있을 때는 늘 1등을 했습니다. 제가 그때부터 가드였어요. 가드는 키워지는 게 아니라 태어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코트 위의 살림살이는 포인트가드가 하는 거지요. 경기를 이기려면 가드가 잘해야 돼요. 지금 보면 허재 강동희 유도훈 이상범 감독들이 다 가드 출신이에요. 센터는 등지고 하는데 가드는 가운데 서서 전체를 보는 시야가 더 많지요."
_감독이 된 소감은요?
"결정이 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어요. 산업은행이 모기업이지만 kdb생명 대우증퓽?모두 지분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모두 재가를 받아야 하는데 여자인데다 나이가 많다는 게 걸림돌이 됐던 것 같아요. 남자도 제 나이가 없는데. 그래서 일단 전부 만났어요. 그런데 만나면 그 분들의 생각이 바뀌었어요. 일반적으로 여자 나이 이 정도면 손주까지 있는 나이니까 건강도 그렇고 선수들하고의 세대차이 이런 걸 많이 걱정한 것 같아요. 직접 만나서는 (이옥자 감독의 실물은 열살 정도 어리게 보인다) 그 덕을 많이 봤고.(웃음) 너무 감사한 건 여자감독을 해야겠다, 그러면 누굴 해야 할까, 이건 구단에서 기본생각으로 갖고 있었어요. 전에도 몇 팀이 해보자고 했지만 쉽게 안되더라구요. 인맥 학연 배경… 서울에서 하고 싶어 일본에서 왔는데 어렵겠구나 했는데 그게 시작이 된 거잖아요. 처음 제의를 듣고는 필드에 돌아간다고 흥분이 됐는데 자꾸 임원들 만나면서 보니까 이게 너무 부담되는 자리다, 어깨가 무겁다, 그랬습니다. 어머 흥분되는데에서 어이쿠 잘해야될텐데로."
_여성감독이 남성감독과 차이는 정말 없습니까?
"사실 여자선수들은 여자 감독에 대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저도 현역을 했기 때문에 잘 알거든요. 여자감독이면 늘 만나잖아요. 벗고도 만나잖아요. 잘 아니까 잔소리가 더 나가니까 잘 부딪치지요. 그런데 27, 8년을 가르쳤기 때문에 이거는 되고, 이거는 안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결국 아이들은 다 똑같아요. 사랑으로 감싸고 진심으로 대하면 선수들도 따라옵니다."
_81년 신용보증기금 코치로 지휘부를 출발할 때 박신자 감독부터 스태프진이 전부 여자였지요?
"박신자 선배는 저를 농구장으로 이끌어준 고마운 선배에요. 제가 상업은행 선수를 마치고 일본으로 진출해서 샹송화장품에서 78, 79 두 시즌을 뛰고 코치를 하고 있을 때인데 박신자 선배가 연락을 해서 '이렇게 팀을 창단하게 됐다'며 '내가 (감독)하고 주희봉 선배가 중간에 있고 너 하면 좋은 팀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그래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했더니 '어, 너는 잘할 수 있어.' 그 한마디에 서울로 돌아왔지요. 박신자 선배가 3년쯤 하고 주희봉 선배도 조금 후에 하고 그만 두고 저만 89년까지 남아서 마지막 1년반은 감독까지 했어요."
_이어 숭의여고(1990~1997)와 용인대(98~99) 감독을 했지요. 그리고 왜 다시 일본으로 가셨어요?
"당시 체육회장이던 김운용 회장님이 지원을 해줘서 용인대에 여성농구단을 창단했어요. 감독으로 간 후 한번도 진 적이 없어요. 나가면 우승이고 시간이 나니까 골프도 좀 배워서 재미있고. 그런데 후지쓰에서 계속 제의가 오는 거에요. 일본에 갔더니 방 하나를 빌려서 임원들이 전부 와서는 설명을 하는 거예요. 용인대 김정행총장한테 제가 이만저만해서 죄송합니다, 그랬더니 감독 이름은 남겨놓고 가라고 해요. 금방 돌아올 줄 아신 거지요. 후지쓰가 2부리그였는데 내가 현역을 했다 해도 공백이 있고 일본 정서도 있으니 너무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1년만에 1부로 올라갔고 애들이 똘똘 뭉쳐서 3년 뒤에는 전일본여자농구에서 결승까지 간 거예요. 이렇게 3년간 성적을 낼 때 샹송이 안 좋았어요. 샹송은 친정인데 도와줘라, 도와줘라 하니까 후지쓰와 3년 계약이 끝나고는 샹송으로 갔지요. 샹송에서 2004년~2005년, 2005~2006년 시즌 하면서 우승했어요."
_계속 우승시키는 비결이 있어요?
"운이 참 좋았다고 생각해요. 비결은 선수들이 똘똘 뭉쳐서 저를 무지하게 신뢰했어요. 제가 태극마크도 달았지만 일본에서 선수로 뛸 때도 이 키에 득점왕 프리드로상 탔기 때문에 선수들이 제 농구를 봤어요. 그때 플레이를 본 아이들이, 아 저런 걸 배우고 싶다, 이 아무개랑 하면 할 수 있다 이런 게 점수를 따고 들어간 거지요. 일본에서는 저같이 현역을 다 마치고 농구를 전수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선수로 잘해도 평생 농구로 먹고 살기 힘들기 때문에 빨리 자기 일을 찾아요. 그런데 현역을 해본 사람이 가르치면 확실히 다르거든요. 손에서 손으로 전수를 해주기 때문에 감각적인 부분까지 전수가 가능합니다. 반면 일본 감독들은 책을 보고 교과서대로 가르치고요. 매뉴얼대로만 농구를 하니까 현역출신보다 떨어지지요."
_일본에서도 여성감독은 처음이었나요?
"2부리그에는 있었는데 1부리그에는 처음이었지요. 제가 한 후에 여성 감독이 9명이 나왔어요. 제가 가르친 아이도 2명이나 감독이 되었어요. 한 명은 대학감독이고 하나는 실업팀 감독이고. 일본은 법인화되지 않았다 뿐이지 연봉계약하고 실업팀 감독이 세미프로 감독인 셈이에요. 그러니까 일본의 여성감독시대를 연 거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_한국에서 빨리 영입하지 않은 게 아쉬웠겠네요.
"그래서 이번에 축하전화를 하시면서 너무 늦게 됐지만 축하한다, 이런 말씀을 하신 분들이 많았어요. 나이는 먹어가고 이제는 못하지 않나 함께 안타까워해주신 모양結×?"
_감독으로 전성기 나이라는 게 있어요?
"우리는 40대 초반 감독이 많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은 감독이 저 같은 나이면 68세 70세 코치를 써요. WNBA(미 여자프로농구)나 중국을 보면 여자시합을 보러 가면 벤치 여자 일색, 기록 여자 일색, 심판 여자 심판, 그런데 한국은 이제 감독 진출이니 어깨가 무거워요."
_프로배구에 조혜정 감독은 팀이 리그 꼴지를 하면서 1년도 못돼 물러났지요.
"제 이야기만 나오면 그 이야기가 딸려 나와서 아주 혜정이한테 미안해죽겠어요.(두 사람은 숭의여고 동기동창으로 절친이다) 혜정이도 지금 맡으면 아주 잘할 수 있을 거예요."
_이옥자감독만의 수칙이 있어요?
"일단 저는 농구장에 들어가면 시합이건 연습이건 앉지 않습니다. 연습 중에는 반드시 코트 안에 있어요. 앉아서 지시하는 거 하고 코트 밖에서 지시하는 거 하고 코트 안에서 지시하는 거하고 선수들이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 다릅니다. 코트가 뭐에요? 씨오유알티(court) 법정이잖아요. 저는 그 정도 예의를 지키려고 노력해요. 제가 선수들 만났을 때 딱 두가지 이야기했어요. '너희들 도와주러 왔다''패밀리 의식을 가져라'. 경기 중에 서 있는 건 뛰고 있는 선수들에 대한 예의이고 코트 안에 있는 것은 팀원으로 당연하다 생각해요."
_프로감독으로 목표는?
"일단 우승이라고 해야 되겠지요. 작년에 리그 2위는 했지만 플레이오프에 진출을 못했는데 챔피언전까지는 갔으면 좋겠습니다."
서화숙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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