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분배 정도를 나타낼 때 쓰이는 모형은 전통적으로 피라미드였다. 돈 없는 서민들이 평평한 바닥을 형성하고, 그보다 적은 수의 중산층이 허리를 받치며, 극소수의 부자들이 뾰족한 꼭대기를 차지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소득 구조를 묘사하기 위해선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가 필요하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 같은 천문학적 거부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음달 페이스북 기업공개(IPO)를 앞둔 주커버그의 올해 예상 소득은 역대 IT 업계 IPO 사상 최대규모인 50억달러(약 5조7,000억원).
이처럼 ‘독보적인 1등’이 등장해 2등과의 격차가 현저히 벌어지면 변별성을 위해 피라미드 꼭대기는 한 없이 위로 치솟게 된다. 162층짜리 부르즈 칼리파 형태가 갖춰지는 것이다.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는 최근 미국 고소득 집단 간의 소득 격차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차트를 만들면서 부르즈 칼리파 모형을 이용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0일 이 차트를 소개하면서 “99%와 1%의 대결은 잊고 1%와 0.001%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에 주목하라”고 전했다.
상위 1% 부자들, “우린 가난하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스캇 윈십이 선보인 5개의 부르즈 칼리파 모형 중 첫번째는 소득 상위 1%가 맨 꼭대기 층에 있는 경우다. 연소득이 7억원에 가까운 상위 1%가 건물 맨 위층을 차지한다면 연소득 4억원의 2% 그룹은 93층에 자리잡게 된다. 이어 상위 10%는 35층에, 연평균 5,700만원을 버는 중간소득 집단은 13층에 각각 입주한다.
여기까지는 부자들의 자존심이 크게 상할 일이 없다. 35층이면 도시 전경을 감상하기에 충분한 높이다. 그러나 윈십은 부자들의 계급갈등을 보여주기 위해 점점 더 막강한 슈퍼리치들을 꼭대기 층으로 불러들인다.
세 번째 모형에서 160층을 차지한 사람은 현재 미 공화당 경선을 휩쓸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대항마로 급부상한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다. 미 대선에 출마한 역대 후보들 중 세번째로 부자인 롬니의 추정 재산은 최대 2,800억원. 그가 11월 대선에서 승리하면 조지 워싱턴에 이어 두 번째 부자 대통령이 된다. 매년 약 250억원의 소득을 올리는 롬니가 꼭대기 층을 차지할 경우 상위 1% 그룹은 4층 방으로 옮겨야 한다. 전망을 포기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길거리에서 울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에 잠을 설치며 없는 자(?)의 설움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롬니 역시 오라클 창립자 래리 엘리슨이 입주하면 6층으로 굴러 떨어진다. 올해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6위를 차지한 엘리슨은 추정 자산 약 41조원에 연평균 소득이 6,200억원에 달한다. 실리콘밸리 최고의 사치꾼으로 알려진 엘리슨이 세계에서 6번째로 큰 개인 요트를 타러 가는 동안 롬니는 6층 방에서 자신이 내세운 부자들을 위한 공약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모형에서 최상층을 차지한 사람은 마크 주커버그다. 전 세계의 부러움을 받는 이 28세의 청년은 누적자산 규모는 크지 않지만(약 20조원), 올해 벌어들일 소득으로는 대적할 이가 없다. 래리 엘리슨이 순식간에 18층까지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롬니를 비롯한 다른 거부들을 건물 로비까지 내몰 수 있는 위력이다.
제2의 주커버그는 누구
이 모형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뭘까. ‘1%의 부자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으니 서민들은 우는 소리 그만하고 계급투쟁을 중단하라’는 메시지인가. 이 모형들은 단지 소득별로 일등부터 꼴등을 늘어놓고 분배 불평등을 논하는 방식이 점점 더 오류가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 등장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순식간에 전세계를 휩쓸며 20대 벼락부자들을 배출하는 요즘, 언제라도 제2의 주커버그가 등장해 원조 주커버그를 로비까지 쫓아낼 수 있다. 첨탑은 한층 더 높아지겠지만, 그러나 이것을 불평등의 심화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얘기다.
윈십은 “(부르즈 칼리파의 뾰족한 형태에서 보여지는) 극심한 불평등은 대부분 사람들의 삶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주커버그가 더 이상 스톡옵션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해서 미국인들의 삶이 더 나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불평등을 논하려면 차라리 부르즈 칼리파의 꼭대기 층을 잘라내고 말하는 것이 낫다. 그 자리는 몇 년 단위로 등장하는 IT 신동들을 위해 비워두고 말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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