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아니 에르노 지음·임호경 옮김/열린책들 발행·129쪽·1만800원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72)는 '소설은 허구'라는 상식을 배반한다. 1974년 데뷔 이래로 그는 철저히 자신의 삶을 작품 소재로 삼아왔다. 가족사, 결혼, 낙태, 유방암 투병은 물론, 국내에도 번역된 대표작 <단순한 열정> 에서는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의 불륜까지 다뤄 화제가 됐다. 단순한>
내밀한 개인사를 이토록 무람없이 드러내나 싶겠지만 에르노의 소설은 치열한 문학 정신의 산물이다. 그의 발언을 옮겨본다. "나는 허구적 재구성을 혐오한다. 현실을 직접 포착하는 것, 상징이나 은유를 피해 객관적 상태 그대로 찍어내는 것이 내 목표다." "기억의 갈피를 뒤지는 것은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보다 어렵다." 그에게 글쓰기는 수사를 배제한 사실적 문장으로 자기 자신을 상대로 생체실험 하듯 생의 고통을 탐구하는 작업이다.(그는 자신의 글이 소설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에 괘념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작품을 '이야기' '미확인 문학 물체'라고 부른다.)
1984년 발표된 <남자의 자리> 는 죽은 아버지에 대한 에르노 식의 추념이다. 궁핍한 농가에서 태어나 험한 공장노동자 생활을 거쳐 변두리 지역에 작은 잡화점을 차리면서 얼마간 신분 상승을 이룬 성실한 가장. 대학 진학과 결혼, 중등교사 임용을 거치며 부모보다 "부유하고도 교양있는 세계"로 진입한 무남독녀의 눈에는 모자람 많은 아비. 홀로 남은 어머니와 시취(屍臭) 속에 장례식을 치르고 귀가하던 길에 '나'는 "아버지와 그의 삶" 그리고 "소녀 시절에 그와 나 사이에 찾아온 그 거리(距離)"(20쪽)에 대해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 아버지를 향한 애증의 감정을 스스로 설명하기 위해. 남자의>
'나'는 아버지의 삶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부녀 사이가 벌어진 결정적 순간들을 짚어 나간다. 초점은 아버지의 말에 맞춰져 있다. "(내가 들은) 그 말과 문장들은 내 아버지가 살았고, 나 또한 살았던 한 세계의 한계와 색채를 있는 그대로 그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47~48쪽) 과연 그가 누누이 혹은 무심코 했던 말들은 그 자체로 또는 서로 충돌하며 그의 교양과 생각, 인간성을 드러낸다. 그 어떤 세밀한 상황 묘사보다도 선명하게. "가진 것 이상으로 폼을 잡아선 안돼!" 등 그의 입버릇 같은 훈계엔 자수성가한 삶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난다. 이 소시민적 긍지는 그러나 딸이 다니는 학교 교장이 보낸 편지를 읽다가 산산조각 난다. "이 배역을 위해 따님은 정장을 하고 나오면 될 거예요." 정장이 뭔지 몰라 끙끙대는 그의 무식에 딸은 창피함을 느낀다.
파편적 회상들이 망자의 일생을 몽타주처럼 구성해간다. 소설 중반을 넘어서도록 딸은 아버지에게 우호적인 기억을 좀처럼 떠올리지 않는다(혹은 못한다). 마침내는 "(아버지는) 내가 결국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아니 어쩌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늘 품고 있었다"(89쪽)고 단정한다. 회상은 신랄하고 부녀 간 거리는 까마득해진다.
허나 아버지는 늙고 병들어간다. 그가 더 이상 품 안의 자식이 아닌 딸 앞에서 "책이나 음악은 너한테나 좋은 거다. 난 살아가는 데 그런 거 필요 없다"(92쪽)고 투정처럼 내뱉을 때, 결혼 후 친정에 잠깐 들렀다 돌아가는 딸에게 "그래, 다음에 또 보자고!"라며 아쉬움을 감추고 호기롭게 외칠 때 딸은(그리고 독자는) 연민을 어쩌지 못한다. 어느 날 딸의 속도 모른 채 "난 널 한 번도 창피하게 만든 적이 없다"(105쪽)고 자랑스레 말하는 늙은 아비를 보는 일은 그저 서글프다. 결국 '나'는 이렇게 쓴다. "그가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127쪽)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위한 에르노 식의 헌사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