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비가 왔는데 오늘은 맑게 개었다. 오후에는 덥기까지 했다. 한동안 내린 비에 벚꽃 잎이 땅바닥에 많이 떨어졌다. 해가 질 무렵 서울 성곽 길을 따라 걷다가 도착한 부암동에는 진한 라일락 향기가 콧잔등을 간지럽게 한다. 하지만 내일은 다시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다. 기온이 오늘보다 십 여도는 떨어진다는데,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춥다고 느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이상기후 때문인지 몰라도 옛날에 비하면 지금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 것 같지 않다. 어릴 적 학교에서 배운 교과서에는 분명히 우리나라가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성 기후라서 사람이 살기 좋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우리는 그걸 교과서에 나온 말을 외워서 알았던 것이 아니라 그저 몸으로 느꼈다. 겨울은 몹시 춥고 눈이 많이 내렸다. 한강은 꽁꽁 얼어붙어서 나만 하더라도 어렸을 때 얼어버린 한강에서 썰매를 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다가 봄이 오면 마치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처럼 모든 게 다 바뀌었다.
그래서 내 어릴 적 느낌으로 봄이란, 늘 새로운 그 무엇이었다. 지나간 겨울과 비교하면 몸이 자란 걸 느꼈고 마음도 조금씩 자라서 의젓해졌다. 깨끗하게 빨아서 바짝 말린 봄옷을 입고 학교에 가면 새로운 친구들, 새로운 선생님, 그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생활도 다 새것처럼 반짝거렸다. 그런데 커가면서 점점 날씨와 계절이 바뀌는 것에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딱히 이상기후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 홍순관이 부른 노래 중에 '다 함께 봄!' 이라는 곡이 있다. 그가 지금껏 앨범에 담은 많은 노래 중에 이 노래를 특히 사랑한다. 나는 이 노래를 어느 때라도 외워서 부를 수 있다. 노랫말이 아주 짧기 때문이다. '꽃 한 송이 핀다고 봄 인가요. 다 함께 피어야 봄 이지요.' 이것이 노랫말 전부다. 마치 동요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노래인데, 안에 담긴 의미를 곱씹어보면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말처럼 그 작은 것 속에 우주를 담고 있음이 느껴진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날씨가 조금 따뜻해지자 길섶에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었다. 누군가 그 모습을 보고 '아, 이제부터 봄이구나!'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날이 좀 풀렸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니다. 봄은 모든 것이 살아나고, 새로워지는 때이다. 꽃 한 송이가 아니라 개나리, 진달래, 목련, 이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흐드러지게 피어나야 봄이다. 봄은 어느 것 하나 만을 위한 봄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신문을 보면 여전히 추운 겨울이다. 여기저기서 삶이 힘들어 신음소리를 내는 사람들 목소리가 들리고, 경제와 정치는 물론 우리 사는 곳 어디라도 딱 부러지게 가리킬 수 없이 엉망이다. 제주 강정마을에서, 서울시청 광장에서, 그 건너 대한문 옆에 설치한 분향소에서, 학습지 노동자들이 모인 곳에서, 할머님들이 모인 수요 집회에서... 여기저기 둘러보면 여전히 칼바람 불어 닥치는 한겨울이다.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언론 쪽도 부당한 일에 맞서 파업 한지 수십 일이 되었다.
이러니 제주에 유채꽃이 만발했다고 한들 그곳이 어찌 봄이겠는가. 서울시청 광장에 스케이트장을 걷고 파릇한 잔디를 깔았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니다. 윤중로에 벚꽃이 활짝 피어서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그 곳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여의도 한쪽 어느 곳은 여전히 한파가 몰아닥치는 겨울이다. 마음 아픈 일들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결코 봄이라고 부를 수 없다.
사람들은 봄이 오면 겨울에 입던 옷을 세탁소에 맡기고 새 옷을 꺼내 입는다. 다이어리를 새것으로 장만하거나 집안 구석구석 대청소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혹은 자기 주변을 새것으로 만들면서 봄을 맞는다. 하지만 꽃 한 송이 핀다고 봄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창문을 열고 좀 더 먼 곳을 내다 볼 필요가 있다. 옆집은 봄을 맞았는가? 옆 동네는 어떤가? 큰 길 건너 시장 사람들은? 그보다 더 먼 곳까지 봄의 기운이 충만하게 가득 찼을 때 비로소 나는 그 날을 봄이라고 하겠다.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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