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게 찾아온 이번 봄은 더 귀하게 눈부시다. 벗들은 자기가 걷던 길에서 발견한 꽃 사진을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올리며 봄을 환하게 전시하고 있다. 어제는 하루 종일 장마처럼 추적추적 비가 왔다. 그리고 오늘은 비현실적으로 쨍한 봄날이다. 꽃나무들은 세수를 한 듯 뽀송뽀송하고 색감은 더더욱 선연하다. 어제 흐린 비가 와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깊디 깊은 맑은 하루가 선물처럼 찾아와준 것이란 생각을 하니, 새삼 날씨의 변화무쌍함에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따뜻하고 귀한 하루다.
가끔 산문 청탁을 받곤 한다. 즐거운 일이지만, 더러 고약한 주문이 따라붙곤 한다. '따뜻한 이야기를 써주세요'라는. 그럴 때마다 따뜻하다는 건 무엇일까, 고민에 빠진다. 사소한 반성과 함께 마음이 훈훈해질 수 있는 이야기라고 받아들여서, 최근엔 침묵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다. 침묵의 좋은 점들도 적고 침묵이 좋지 않을 때에 대해서도 적고, 우리가 침묵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에 대해서 적어두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스물두 번째 자살에 대해서, 강정마을의 보존에 대해서 부디 침묵하지 말고 열심히 말하고 널리 알리며 살아야겠다는 훈훈한 이야기를 해보았다. 편집자는 내게 책 첫머리에 실릴 글인데, '자살'이라는 단어가 너무 어두우니 수정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자살'이라는 말을 빼면 내 글은 진정성을 잃고 따뜻함의 효과가 선명해지지 않는다고 우겨말하려 했으나, 나는 이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분고분 좋게 좋게 대응했다.
흐린 뒤에 개인다는 것은 날씨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읽고 쓰는 글에도 천변만화하는 날씨와 같은 파동이 있어야 하고, 그 과정을 겪어야 진짜 따뜻함과 맑음에 가닿을 수 있다. 그래야 가짜가 아니다. 우리 삶의 리듬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격정어린 이야기들 중에서, 봄날의 따뜻한 이야기만 도려내어 보여주는 것은 우리 삶을 속이는 것에 가깝다. 그렇게 글이 삶을 속이면 우리 삶은 허약해지기만 한다. 우리의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와 상처들이 어떤 파동과 요동을 거쳐 어디로 향하는지, 그 과정 자체를 온전히 이해하고 싶어 글을 읽는다. 우리를 둘러싼 우울한 이야기와 슬프고 괴로운 이야기들 속에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진짜 이야기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똑바로 직면하고 그걸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많이 괴로운 일이어서 쉽지가 않다. 그래서 글쟁이는 대신 그것을 해주는 사람이다. 괴로운 일을 용감하게도 밥 먹듯이 하고 있다는 자긍심이 작가의 자긍심이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따뜻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을 재주가 있다는 게 작가의 자긍심이 아니다. 비온 뒤의 맑은 날처럼, 아픈 과정을 용기 있게 통과해서 얻는 맑고 투명한 결론은 사람살이의 기본 레퍼토리다.
예쁜 글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소비하려는 풍토는 어째서 반성을 모르고 지속되는 걸까. 진실의 어두운 부분을 철저하게 보여주는 글쓴이의 용기 덕분에 읽는 이가 감동을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왜 자꾸 모르는 척하는 걸까. 진실로 춥고 어두운 이야기가 진실로 맑고 따뜻한 감수성으로 화학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독서'가 주는 경이로움이다. 따뜻함만이 담긴 이야기는 잠시 따뜻함을 소비하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를 정말로 따뜻하게 해줄 리 없다.
내가 생각하는 따뜻한 이야기는 이런 거다. 내가 지금 얼마나 추운지를 정확하게 말함으로써 정말로 추운 누군가가 나 혼자 추운 것은 아니라는 위안을 받는 것이다. 나도 춥지만 나보다 더 추운 사람을 끝없이 떠올려 기억함으로서 너무나 마음이 추운 우리들 각자는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안도를 얻는 것이다. 위안과 안도가 힘이 되어 이 추운 계절을 통과해나가는 것이다. 쌍용차 해고노동자가 스물두 번째 자살을 하는 나라에서, 우리들 현관문 앞에 아침 이슬을 받고 도착한 일간지 어디에도 이런 기사가 실리지 않는 나라에서, 가장 훈훈한 글은 이런 이야기를 먼저 챙겨 말할 줄 아는 것이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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