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험마저 영세 노동자에 하청하는 대한민국
지난해 12월 16일 눈보라가 몰아치던 날 전남 영암군 현대삼호중공업의 하청업체 직원 장모(57)씨는 건조 중이던 배의 데크하우스(선원들의 거주 공간) 바깥 쪽에 추락방지 시설인 핸드레일을 설치하기 위해 14m 높이의 데크하우스에 올랐다. 장씨가 핸드레일 묶음을 푸는 순간 무거운 핸드레일이 쏠리면서 그는 무게중심을 잃고 데크하우스에서 떨어져 숨졌다. 추락방지 시설을 처음 설치하는 업무를 맡은 그의 주변에는 안전난간 하나 없었고, 허리에 맨 안전벨트를 걸 곳도 없었다. 또 계약한 작업 기간을 맞춰야 하는 하청업체는 아무리 날씨가 궂어도 작업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장씨 사망 후 3개월도 지나지 않아 이 중공업에서는 3명이 더 숨졌다. 2월 6일 5m 상공에서 운반 중이던 대형 철문이 떨어져 하청업체 직원 장모(31)씨가 깔려 사망했다. 4일 뒤에는 현대삼호중공업 직원 이모(37)씨가 밀폐된 블록 안에서 용접기로 얼음을 녹인 후 호흡곤란을 호소하다 사망했고, 같은 달 24일에는 배관설치 업무를 맡았던 하청업체 직원 전모(30)씨가 지게차에 치어 사망했다. 불과 3개월 동안 안전 관리 소홀로 4명이 사망하고, 그 중 3명이 하청업체 직원인 현대삼호중공업의 실태는 우리나라 산업재해 현실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28일은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 1993년 태국의 한 인형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인형을 훔쳐갈까 봐 공장 문을 잠근 상태에서 화재가 발생해 노동자 188명이 사망한 것을 기려 국제노동기구(ILO)가 지정한 이 날, 추모해야 할 산재 사망자가 가장 많은 국가가 바로 우리나라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2008년 기준 우리나라의 인구 1만명 당 산재 사망자는 1.07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많다. 미국(0.38명)의 3배, 0.06명에 불과한 영국보다는 18배나 많은 수치다. 지난해에만 총 2,114명, 매일 6명 꼴로 산재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더욱이 이 같은 산재 사망은 노동약자인 영세 하청 노동자들에게 집중되고 있다. 한국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따르면 2009년 국내 9대 조선사의 산재 사망자 중 원청 노동자는 3명 하청 노동자는 10명으로 전체 사망자의 80% 정도가 하청업체였다. 2002년에는 원청 사망자가 18명, 하청 0명이었지만 이후 하청 사망자 비율이 계속 늘었다. 2004년까지는 원청업체가 하청업체 노동자까지 산재보험에 가입했기 때문에 그 이전 하청 노동자 사망이 원청으로 집계됐을 가능성이 있으나, 2000년대 조선업에 사내하도급이 늘면서 위험한 업무가 하청 노동자들에게 전가되고 있는 추세를 보여준다.
장재인 금속노조 현대삼호중공업지회 노동안전부장은 "하청업체 직원들은 주로 배 안의 밀폐공간에서 배관 설치 등 작업하기 어렵고 힘든 곳에서 일한다"며 "조선소 내 사고로 다치거나 사망하는 노동자의 90%는 하청업체 직원"이라고 말했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국장은 "하청업체는 일하다 다쳐도 원청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워 산재를 은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통계조차 제대로 없는 실정"이라며 "조선업뿐 아니라 전체 산업의 산재 노동자 중 80%가 하청 노동자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 약자가 건강권과 생명권을 위협 받으며 사지로 내몰리는 것은,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상 원청업체는 안전교육 지원 등 최소한의 조치만 하도록 돼 있을 뿐 사실상 안전조치에 대해 책임이 없고, 하청업체 사업주는 자체적으로 안전장비를 갖출 기술력이나 자본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일자리를 원하는 하청업체 노동자들만 아무런 보호막 없이 작업을 이어간다. 원청업체는 위험마저 '외주화'하는 것이다.
임준 가천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원청에서 하청으로,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위험이 전가되는 구조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며 "원청업체가 위험을 생산하고 관리하는 주체로서 같은 현장에서 일하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안전도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