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논문을 쓰던 때의 일이었다. 청소년들의 포르노 보기를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를 두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학생들과 인터뷰하고 내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미 다 마친 다음이었다. 문제는 해석이었다. 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사람의 어떤 이론적 틀로 해석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달라지고 있었다. 문제제기와 목차를 대충 적고 난 다음 지도교수에게 조언을 구했다. 인식론이나 방법론적인 것에 대해 이러저러한 조언을 한 다음 마지막으로 지도교수가 한 마디를 보탰다. "명심해. 논문은 인용과 참고문헌이야."
순간 멍해졌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평상시에 창조적 독해를 유난히 강조하시던 분이라 참고문헌을 중시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여러 글쓰기 중에서 논문이란 형식은 인용과 참고문헌을 통해 말하는 것이라고 다시 강조하셨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학문적 글쓰기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확실히 감을 잡을 수 있었고 훈련이 되었다. 그 다음부터 논문 형식으로 글을 쓸 때는 내가 아무리 '독창적'으로 생각해낸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혹시 어디서 본 것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에 대해 늘 점검하는 버릇이 들곤 하였다.
내가 실제로 겪은 사례가 하나 있다. 아주 오래전에 도서관에서 서고를 이리저리 서핑을 하다가 재미있는 책을 하나 발견하였다. 한 철학자가 쓴 짧은 토막글이었다. 프랑스에서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뀐 시점을 68혁명이라든가 다른 정치적 사변에서 찾지 않았다. 한 토크쇼에 부인이 나와 남편이 발기부전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 공론장이 무너진 역사적인 순간으로 의미부여하는 글이었다. 그때까지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테제에만 익숙해있던 나한테 완전히 발상의 전환을 가져다 준 글이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사생활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사적 이슈로 도배되고 있는 공적 영역을 방어하는 것이야 한다는 대단히 인상적인 글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논문도 아니고 단행본 작업을 하면서 '리얼리티 쇼'를 다루면서 꼭 이 이야기를 넣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 철학자가 누구인지, 어느 책에서 본 것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도서관으로 찾아가서 사회과학 서고를 거의 다 뒤지다시피 했다. 프랑스에서 나온 책이라는 것만 확실했다. 며칠을 찾았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쓰던 책에 이 이야기를 집어넣는 것은 포기해야만 했다. 내 이야기가 아니고 누군가의 이야기인 것이 확실한데 거기다 '어디서 본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이라고 단서를 달고 글을 쓰는 것은 지적 게으름에 대한 고백에 다름 아니며 부도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단행본도 이런데 논문이야 오죽하겠는가. 논문을 쓸 때는 아예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은 없다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 속편하다는 말이 있다. 지도교수가 일러준 것처럼 논문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인용으로 시작해서 인용으로 끝나는 것이다.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이란 그 길고 긴 인용이후에 다른 논문들과 비교하면서 그 차이를 통해 독창성을 드러내는 것이 논문이다. 한 지인의 말을 빌린다면 인용 하나 하기 위해 전국의 도서관을 다 뒤져서 책을 겨우 찾아낸 다음 그걸 정독하고 난 이후 겨우 서너 줄 인용하면서 쓰는 것이 논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논문을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못난이 신드롬'이라는 것에 빠지곤 한다. 논문을 쓰는 동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가 무능력하고 글재주도 없고 못났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권이 지금 이 '못난이 신드롬'에 빠진 석박사 후보생들에게 완전히 절망을 안겨주고 있다. 눈만 뜨고 나면 총선 당선자들의 표절시비다. 누군가는 대리로 논문을 써주고, 누구는 거의 복제 수준의 표절을 하며, 누구는 참고문헌에만 달랑 표시했다고 논문에서는 인용을 누락시키면서도 잘도 학위를 따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왜 논문을 써야하는가. 누가 답을 해줄 것인가.
엄기호 교육공동체 벗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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