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詩心 솟구쳤던 첫 유배지
정약용(1762~1836)이 경상도 장기현(현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도착한 때는 양력으로 따져 1801년 4월 하순이다. 한양을 떠난 지 11일 만이었다. 봄의 윤슬이 반짝이는 작은 포구마을 장기. 느릅나무 녹색 그늘 속으로 살구꽃잎이 파고드는 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곳의 첫인상을 기록하며 장향진황지지(瘴鄕秦荒之地), 곧 '병의 원인이 되는 악독한 기운이 솟고 잡초가 우거진 땅'이라고 썼다. 그는 죄인의 몸이었다.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정약용은 정조가 죽고 두 달 만에 역적으로 몰렸다. 18년 유배 생활이 시작될 때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명성이 동방에 나타나니/ 금부의 관원들 시끄럽게 소리치네/ 산바람 부니 비는 오다 그쳤는데/ 서로 이별이 서러워 머뭇거리네/ 주저하는 것이 무슨 보탬이 되나/ 끝내는 이 이별 없을 수 없는 것을/ 옷깃을 떨치고 귀양길 가네/ 아득한 내와 언덕을 넘어가는데/ 얼굴빛은 비록 장엄하나/ 마음은 어찌 처자식과 다르리오(후략)"('사평별(沙坪別)'ㆍ장기로 유배를 떠나며 지은 시)
숫자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가 태어난 지 몇 해째라고 소란 떠는 바람에 곰팡내 나는 정약용의 문집을 들춰볼 마음이 일었다. 건성건성 넘어가던 낡은 페이지에 붙어있던 두 글자가 눈에 와 박혔다. 폐족(廢族). 책 속의 이 말과 나는 아마 오래 전에도 마주쳤을 텐데, 새삼 공명하는 것은 지켜온 것이 박살 나는 심정을 이제 알 만한 나이가 됐거나, 작금에 이 말이 소비되는 세태에 알게 모르게 염증을 느낀 까닭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폐족의 땅을 걸어보고 싶어졌다. 지도를 펴고 정약용의 첫 유배지를 찾았다. 이상세계를 건설하는 꿈을 불태우다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사내의 눈에 비친 세상의 풍경이 궁금했다.
"산머리에 쓸쓸한 마을, 민가 마흔 채/ 기울어진 성문엔 꽃마저 시들었어라/ 마실 만한 샘이라곤 한 구멍도 없어/ 성에다 줄 매달아 수차(水車)를 쓴다네/ … /한조각 돛단배가 구름바다 헤치고서/ 울릉도 간 남편이 이제 막 돌아왔네/ 바닷길 험했느냐고 안부도 묻지 않고/ 배에 가득한 대나무 보고야 얼굴이 펴지네(후략)"('기성잡시(鬐城雜詩)'ㆍ장기에 도착한 직후 이곳 풍물을 묘사한 시)
장기는 포항 구룡포와 경주 감포 사이에 있다. 가느다란 포장도로가 겨우 뚫린 것이 1990년대의 일이다. 세세한 지도가 아니고는 면 소재지조차 표시돼 있지 않을 정도로 외지다. 읍내로 들어가는 굽이마다 해병 훈련시설과 마주쳤다. 강원도 접경지대의 풍경 같다. 이곳이 오랜 유배지였다는 사실을 납득하는 데 굳이 설명이 필요 없었다. 신라 때부터 이름을 얻은 고을이지만 지금 장기를 대표하는 것은 고려 때 축조된 읍성이다. 마무리 단계의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동해의 일출을 볼 수 있는 야산 위에 놓인 성곽의 출렁임이 호쾌했다. '기성잡시' 속의 민가 40채는 지금 10여채로 줄었다. 성은 그 흔한 동동줏집 하나 없이 소담한 산촌의 정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지팡이 끌고 사립문 밖 시내로 나와/ 선명한 모래사장 천천히 지나가노라/ 몸뚱이는 장기(瘴氣)로 쇠약해지고/ 옷은 바람을 받아 기우뚱거린다/ 해는 하늘거리는 풀을 비추고/ 봄은 고요한 꽃에 깃들었구나/ 사물이야 절기마다 변한다 해도/ 몸뚱이 있는 곳이 내 집이라 하더니(후략)"('유림만보(楡林晩步)'ㆍ해거름에 느릅나무숲을 거닐며 쓴 시)
정약용은 본래 서정을 표현하는 데 박절한 경세가였다. 우주의 철리를 깨우쳐 현실 정치에 적용하기에 다급했기에 시율(詩律)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중앙으로부터 내쳐져 이곳 장기에 머물면서 그는 미친 듯 시를 쓰기 시작한다. 1801년 말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기까지 220일 동안 쓴 130여편이 전해진다. 남아 있는 것만 셈해도 하루 걸러 한 편이 넘는 양이다. 처음엔 가슴 속의 울혈 같은 시를 쏟아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눈길은 장기의 풍경과 민촌의 살림에 닿는다. 읍성에서 내려와 장기천(川)이 바다와 만나는 곳으로 향했다. 해변의 풍경 역시 소박했다. 200년 전 이곳은 해녀들의 물질로 분주했던 모양인지, 장기시편 가운데는 그니들을 묘사한 것도 있다.
"아가(兒哥ㆍ'며느리'를 뜻하는 사투리를 음차한 것) 몸에 실오라기 하나도 안 걸치고/ 짠 바다 들락날락 맑은 연못같이 하네/ 궁둥이 높이 들고 곧장 물에 뛰어들어/ 잔물결에 꽃오리가 노니는 듯하다가는/ 물결무늬 합해지니 사람은 보이잖고/ 태왁(단지) 하나 물 위에 두둥실 떠다니네(후략)"('아가사(兒哥詞)'ㆍ해녀의 노동을 묘사한 시)
장기천을 따라 걸으며 따사로운 봄볕을 받았다. 이 천변에 불과 수십년 전까지 남한에서 가장 큰 마을숲이 있었다. 정약용이 유배 생활을 하던 시절 이미 아름드리 나무였던 활엽수림이다. 장기시편에 등장하는 이팝나무, 느릅나무, 느티나무, 팽나무들은 새마을사업이 한창이던 시절 식량 증산을 이유로 베어지고 없다. 이젠 농사도 짓지 않아 숲의 터가 황량했다. 한문 문장 속의 글귀만으론 그 숲의 푸르름이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 정약용이 모진 국문으로 곤죽이 된 몸을 끌고 와 누인 곳은 지금 장기초등학교 뒤편의 언덕배기로 추정된다. 무성한 잡목에 가려져 그가 위리안치(圍籬安置)됐던 터는 좁고 어둑했다. 이곳에 갇혔던 폐족의 내면을 짐작할 길 없어 다시금 막막했다.
"(전략)다투는 기운이 맑은 하늘 가리우고/ 티끌만한 일로도 살육을 일삼으니/ 고양(羔羊ㆍ어린양)은 죽어도 소리 한번 못치는데/ 시호(豺虎ㆍ승냥이와 여우)는 오히려 두 눈을 부릅뜬다/ … / 누가 있어 큰 잔치 베풀어서는/ 비단 휘장 둘러친 화려한 집에/ 일천 동이 술을 빚고/ 일만 마리 소를 잡아/ 묵은 악폐 씻기를 다 같이 맹세하여/ 복과 평화 오기를 기약할 것인가(후략)"('고시(古詩)' 중 일부ㆍ핍박 받는 처지를 동물에 비유한 시)
■ 여행수첩
●포항 시내에서 경주 감포로 이어지는 929번 지방도를 타고 가면 장기면에 닿을 수 있다. 익산_포항 고속도로보다 경부고속도로가 가깝다. 건천IC에서 나와 포항 방면 20번 국도를 이용하면 된다. ● 장기읍성 안에 트레킹 코스가 개발돼 있다. 장기천이 동해와 만나는 곳엔 일출 명소인 날물치(生水岩)가 있다. 6월 산딸기문화축제가 열린다. 장기면사무소 (054)270-1301.
포항=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도움말 금낙두(전 장기중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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