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주의 대안 논의보다 내재적인 것 바꿔야…다시, 계획·시장·화폐에 대한 고전적 논쟁을"
알베르토 토스카노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며 유럽 좌파의 차세대 이론가로 주목받고 있는 철학자다. 영국 워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런던대 골드스미스칼리지 사회학 강사로 재직하면서, 마르크시즘 학술지 <역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 의 편집자로 활약하고 있다. 정통 마르크시즘의 대부 격인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이 잡지를 "마르크시즘의 학문적 부활을 주도하는 가장 중요한 세력 중 하나"라고 평한다. 이 잡지가 매년 11월 런던에서 여는 회의에는 유럽 지역 좌파 학자가 500명 이상 참가하고, 캐나다 호주에서도 이와 연계한 학술대회가 열릴 만큼 국제적 영향력이 상당하다. 역사적>
토스카노의 학술적 관심은 현대 사상에서 공산주의 이념의 유효성을 연구하고 광신주의(fanaticism) 개념을 계보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특히 그는 2010년 출간한 <광신> 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다른 정치적 가능성을 봉쇄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위험하고 미친 짓'쯤으로 평가절하 돼온 광신주의의 혁명적 기능을 조명, 세계 지성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토스카노는 또한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영어판 번역자로도 명성이 높다. 바디우가 포스트구조주의로 일컬어지는 프랑스 주류 철학과 달리 마르크시즘적 입장을 견지하며 보편성 총체성을 추구하는 철학자라는 점에서 토스카노의 학문적 노선과 상통한다. 광신>
토스카노는 실천적 지식인이기도 하다. 2010년 영국 정부의 대학 개혁안에 반발해 런던에서 일어난 등록금 인상 및 교육 예산 삭감 반대 시위에 공동 지지 성명을 발표하고 시위에 동참했다.(그가 당시 행동을 함께 한 지식인들과 만든 책자는 <대학에 저항하라> 라는 제목으로 국내에도 출간됐다) 지난해에는 미국의 월가 점령 시위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영국 권위지 가디언의 주요 필진으로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의 이슈에 대해 진보적 시각의 칼럼을 게재하기도 했다. 토스카노와의 인터뷰는 이택광 경희대 교수가 이메일을 통해 진행했다. 대학에>
_저서 <광신> 에서 계몽됐다고 해서 광신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펼쳤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무엇인가. 광신>
"세 가지다. 첫째, 학계와 공공 담론에 특히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맥락에서 만연해 있던, 계몽과 광신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생각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비판은 정치와 종교, 정념과 합리성에 대한 서구 철학과 정치적 논쟁의 역사를 깊게 파고 들어가야 가능했다. 둘째, 식민주의적이고 반혁명적인 사고 가운데 광신이 예측할 수 없는 반향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셋째, 맹목적인 해방의 정치학을 반대하는 정치 이론과 실천을 형식화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광신의 사례에 대한 고찰을 활용하고자 했다."
_당신은 자유주의 정치학이 자기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광신주의를 이용한다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신자유주의화도 주체성의 생산과 재생산을 통제하기 위한 정치적 종교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결정적이라기보다 기회주의적이라고 본다. 이데올로기적인 기획으로서 신자유주의 또는 신보수주의가 과다하게 포장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장기적인 사회경제의 역동성을 손상시키는 것이 바로 이런 이데올로기적 기획이다. 신자유주의가 (종교처럼) 주체성을 생산하는 측면을 과소평가할 수 없겠지만, 신자유주의는 결핍감을 부추기는 담론으로 상시적 위기 상황을 조성하는 방식으로 소극적인 주체에까지 작동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부채 관계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 부채는 서브프라임모기지, 학자금대출, 신용카드 등을 포괄한다. 부채는 개인의 미래와 관련한 모든 문제에 영향을 미친다. 시간의 상품화, 화폐의 사회 권력에 대한 실재적이고 환상적인 접근이 이런 관계이다. 이런 것들이 푸코적인 통치성 이론이 제시하는 것보다도 훨씬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주체를 생산하는 장치다."
_신자유주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이런 논의는 기본적으로 타락한 자본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규정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많은 경제학자와 지식인들이 계속되는 위기와 예상보다 빠른 황폐화를 비판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재난적 결과를 예측했다. 존 그레이, 에드워드 러트왁, 제프리 삭스, 폴 크루그먼, 조지프 스티클리츠 같은 이들이다. 얌전하긴 했지만 이런 좌편향은 환영할 만한 현상이다. 경제학에서 비정통적 전통을 되살리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는 비판적 지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앨런 그린스펀처럼 위기의 원인을 '결함 있는 모델'에서 찾는 것은 문제다. 구체적 실천에서 신자유주의는 유토피아적이라기보다 기회주의적이다. 나는 이런 위기를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고 본다. 신자유주의가 없었다면 우리는 다소 안정적인 자본주의 체제에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는 것은 중요하다. 계급적 기획으로서 신자유주의는 공격적이다. 위기를 기회로 밀고 가면서 강탈과 상품화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_자본주의의 대안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안이라는 개념은 자본주의 '옆'에 다른 사회 체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생각은 '다른 세계'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이 안에서 내재적인 것을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추상적 부정이 아니라 결정적인 부정이다. 문제는 대안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이행의 개념이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인 매개를 만들어내는 양식에 대한 도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맥락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하지만, 우리는 계획, 시장, 화폐에 대한 고전적인 논쟁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_로렌조 키에사와 공저한 <이탈리아적인 차이> 라는 책에서 당신은 급진적 사고를 둘러싼 이론적 논쟁을 소개했다. 정치 이론에서 이탈리아 이론가들의 운동을 무시할 수 없다고 했는데 왜 그런가. 이탈리아적인>
"국가적 혹은 지역적 특수성을 이론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힘들고 문제가 될 소지가 있지만, 역사적 궤적, 지적 생산물 유형, 정치적 형식이 독특한 이론을 형성한다고 보는 데에는 무리가 없겠다. 마르크스가 프랑스 정치사상, 영국의 정치경제학, 독일철학을 반영했듯. (이탈리아 철학자) 로베르토 에스포지토가 <살아 있는 사고> 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삶과 정치, 역사의 구성적 관계를 중시하는 것이 이탈리아 이론의 특징이다. 마키아벨리로부터 비코, 그람시, 그리고 다양한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에 이르는 '불순물 섞인' 사고가 이를 보여준다. 지역적 특색은 이제 세계적 국면에 놓여 있다. 국제 학계와 지식계에서 이탈리아 이론은 공용어로 거듭나고 있다. 반대로 이탈리아 이론가들은 그 동안 무시했던 자신들의 전통을 다시 돌아보고 있다." 살아>
_당신은 제이슨 바커가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마르크스 재장전'에 출연해 생산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정통 마르크스의 방법론이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가 현재의 위기를 이해하기에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라는 용어보다는 라이트 밀즈가 이야기한 '평범한 마르크스주의'를 더 선호한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어딘가 종교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경계하는 것은 현재가 전례 없는 새로운 상황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생각은 종종 제한된 근거에서 비롯되는데, 예컨대 북반구에서 '고전적'인 노동계층이 줄어든 걸 놓고 '산업적ㆍ물질적 노동이 소멸했다'고 잘못 단언하는 식이다.
마르크스를 통해 제시된 가치생산과 축적의 논리는 여전히 자본주의 핵심으로 남아 있다. 자본의 전략, 형식, 경로가 다양해졌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단번에 표현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마르크스주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 자신이 위기를 탐구했던 그 풍성함으로 증명하고 있다. 과잉축적에서 임금 긴축에 따른 장기적 침체, 금융화의 논리에서 미국 제조업 분야의 과잉생산, 경제제국주의에서 자본가들의 라이벌의식, 이 모든 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논의했던 것들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런 문제의식을 발전시키고 있는 대표적 학자다. 마르크스의 접근법이 쓸모없다는 것은 퇴행적인 이야기이다."
_요즘 계급모순은 세대모순으로 변화한 것처럼 보인다. 한국에서도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에 비해 기회를 박탈당하는 경우가 많다. 몇몇 지식인들은 신자유주의적 경제가 젊은 세대의 미래를 파괴한다고 비판한다.
"세대 분리는 계급투쟁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와 제도의 구조가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기회와 생활을 파괴하는 것과 더불어 나이 든 기성세대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은 수탈적 경제모델의 결과이다. 실제적으로 세대 간 문제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영국의 경우 교수 연금 시위에 학생들이 지지를 보내고, 학생들의 등록금 시위에 대해 교수들이 지지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 문제는 자본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재생산, 공통적 자산의 가능성, 사회적 평등의 기준에 대한 공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_자유주의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좌파적 이론이 위기에 봉착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현상이 왜 발생한다고 생각하나.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19세기에 첫 번째 '위기들'을 경험했다. 그래서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최근의 문제의식도 1970년대에 이미 제기되었던 것이다. 금융 관련 신문들이 마르크스가 옳았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위기의 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80, 90년대 우리가 목격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거부감은 채 사그라지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 이론들이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과 집단적인 대중운동이 '유기적'으로 이런 이론과 결합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지배적인 질서에 도전하는 정치적 재구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떤 이론이든지 현실을 거머쥘 때만 전환적인 계기를 맞이할 수 있다. 80년대 이래로 만연한 탈정치화와 반세계화 정치의 상징성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칸트의 말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반세계화 운동은 '역사적 징조'가 아니라면 최소한 '전-역사적 징조'일 것이다. 이런 운동은 참을 수 없는 조건에 대한 집단적인 행동의 가능성을 환기시키며, 국가와 자본의 파괴적인 권력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보여준다."
_앞으로의 출판 계획은.
"두 가지 작업을 진행 중이다. 첫 번째는 제프 킹클과 함께 준비하고 있는 <절대에 대한 지도 그리기> 이고, 두 번째는 <마지막 철학: 자본주의와 실재적 추상화> 이다. 앞의 책은 현대 자본주의의 역동성과 효과를 재현하는 것에 딴죽을 거는 예술과 영화에 대한 다양한 연구이다. 결국 이 문제는 재현 불가능한 총체성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뒤의 책은 지난 몇 년간 내가 했던 작업들에 기초한 것이다. 자본주의가 철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인데, 이것을 나는 '실재적 추상화'라고 명명했다. 화폐, 가치, 교환, 금융 등 현실과 관계가 추상화되면서 추상적 지적 실천으로 우월성을 인준 받던 철학이 영향을 받고 변화했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에서 나는 화폐ㆍ상업의 역사와 서구 철학의 기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마지막> 절대에>
_당신을 한국 독자에게 처음 소개하는 인터뷰다. 유럽을 대표하는 소장지식인으로서 당부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
"우리에게 남겨진 문제는 거리를 넘어서 정치적인 구호와 사회적인 분석을 가능하게 만드는 공통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맥락과 투쟁의 궤적에 주의를 기울여야 가능한 일이다. 서구 학계가 세계적으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하는 말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이런 헤게모니의 상황은 학계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른 세계의 사회정치적 실천으로부터 유리된 이론을 조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론이 확장되고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것은 나쁘지 않다. 이론의 공통성에 근거해서 급진적 전환에 대한 욕망들에 대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리=이훈성기자 hs0213@hk.co.kr
■ 토스카노의 대표 저작 '광신'
알베르토 토스카노는 논문, 공저를 제외하고 두 권의 단독 저서가 있다. 2006년에 낸 <생성 극장(theatre of production)> 은 철학자 들뢰즈, 퍼스, 시몽동 등을 대상으로 개성화(individuation)라는 철학적 주제가 다뤄진 역사를 살피면서 새로운 논의 방향을 제시한 책이다. 생성>
2010년 <광신(fanaticism)> 을 내면서 토스카노는 유럽 지성계에서 큰 주목을 받게 됐다. 흔히 광신주의로 치부되는 정치적 급진주의ㆍ근본주의의 정치철학적 의미를 재조명한 이 책은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마르크시즘을 재사유하려는 시도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국내에는 올 하반기에 출간(후마니타스)될 예정이다. 번역을 맡은 문화비평가 문강형준씨는 "광신이라는 저주받은 개념을 철학적으로 성찰하면서 되살려 내려는 시도"라고 이 책을 정의했다. 광신(fanaticism)>
합리성이 지배하는 근대 이후의 서양에서 광신은 사이비 종교부터 폭력시위에 이르기까지 사라져야 할 '악'으로 표상되고 있다. 토스카노는 역사적 관점에서 이런 편견을 뒤엎는 사유를 펼친다. 첫째 서양사 전체에서 광신은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촉발하는 혁명적 시도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지적한다. 둘째로는 이성의 체제를 탄생시킨 17세기 계몽주의의 합리성이나 이성도 실은 광신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대표적 계몽주의 철학자인 칸트가 한때 '이성의 광신자'로 불린 것은 이를 방증하는 한 사례다. 한마디로 모든 정치적 시도는 광신(열정)에서 비롯한다는 것이 토스카노의 견해다. 국내에도 몇 권의 저서가 소개된 영국 보수주의 학자로, 마르크시즘을 위시한 모든 정치적 급진주의를 '유토피아주의'로 규정하며 위험성을 강조하는 존 그레이와 비교해서 <광신> 을 읽어보면 흥미로울 듯싶다. 광신>
토스카노가 옹호하는 광신은 그러나 인류 공통의 조건을 추구하는 '보편성'을 전제로 한다. 예컨대 자유ㆍ평등ㆍ박애에 바탕한 인류 해방을 목적으로 삼았던 프랑스혁명은 바람직한 광신이지만, 나치즘과 아리안 민족주의는 진정한 광신이 아니다. 문강형준씨는 "정치가 하나의 제도로 굳어진 탓에 '나꼼수'나 정권교체 수준에 정치 혁명의 상상력이 머물러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토스카노의 사유는 상상력의 폭을 넓혀줄 것"이라고 말했다.
정리=이훈성기자 hs0213@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