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척 거구가 앞에 서니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가 작았다. 그 두툼한 손가락에서 나오는 분산 화음은 화려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튼실한 왼손으로 힘있게 타건 하는 저음 선율은 마치 재즈의 통주 저음(通奏 低音) 같은 리듬감을 객석에 선사했다. 남성적 피아니즘의 대명사로 그의 스승이었던 블라디미르 크라이네프의 예술혼이 환생이라도 한 걸까.
3곡의 격렬한 앙코르 연주를 듣고서도 객석은 한동안 자리를 뜰 줄 몰랐다. 공연 후반부를 가득 메운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 남긴 여운이 너무 컸던 것일까. 22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을 메운 갈채와 환호는 드미트리 고딘(37)의 연주와 힘겨루기라도 하는 듯 했다.
라흐마니노프, 스크리아빈, 메트너 등 함께 들려준 20세기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에서도 선 굵은 그의 연주는 깊숙이 각인됐다. 마치 음의 압력이 객석으로 밀려드는 느낌이었다. 고딘은 메노뮤직이 기획해 2010년부터 열어온 '러시아 거장 시리즈'의 3번째 주인공이다. 곡마다 뒤따른 갈채에 깊이 머리 숙여 감사한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객석을 찬찬히 응시했다. 그러나 인사가 끝나자마자 피아노 앞에 앉아 곧바로 연주에 몰입했다. 스타덤을 음미하려는 동작을 일절 배제하겠다는 의지마저 읽혔다.
고딘은 연주 후 무대 뒤 인터뷰에서 "대단히 진지한 관객 덕에 매우 드문 경험을 했다"며 "IBK홀의 음향은 최고"라고 말했다. 러시아심포닉오케스트라, 모스크바 필하모닉 등 구소련의 문화적 성취를 상징하는 교향악단들과 공연했던 고딘에게도 첫 내한 무대가 새로운 체험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어 그는 동구권을 중심으로 활동중인 지휘자 이영칠씨를 거론해 "한 달 전 그의 지휘로 불가리아에서 소피아필과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성공적으로 연주했다"며 "협연자가 음악에만 집중하게 하는 능력이 놀랍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음악으로 구 공산권과 한국의 인연이 더욱 각별해져 가는 느낌이었다.
내한 공연은 25일 제주아트센터에서 서울과학기술대 황순학 교수의 해설을 곁들인 '드미트리 고딘의 피아노 리사이틀 매직'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그는 곧 유럽,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새 무대를 갖는다.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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