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은행, 현대투신, 대우자동차….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숱한 기업이 외국기업에 팔렸다. 당시로선 부실 기업을 누구라도 사주기만 한다면 감지덕지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 한국은 먹잇감을 찾던 외국자본에게 더 없이 좋은 사냥감이었다.
이제 유럽이 세계 각국의 표적이 되고 있다. 유럽 재정위기 장기화로 경영난이 지속되면서 매물로 나오는 기업들이 늘고 있고, 은행들은 자본 확충을 위해서 보유 자산을 시장에 내놓고 있다. 특히, 피그스(PIIGSㆍ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를 비롯한 재정위기국들이 공기업 민영화와 정부 자산 매각에 적극 나서면서 향후 인수ㆍ합병(M&A)의 큰 장이 설 것으로 전망된다.
24일 삼성경제연구소와 블룸버그 등에 따르면 지난해 유럽 M&A 거래액은 5,417억달러로 전년보다 23% 증가했고, 거래 건수(5,380건)도 소폭(2.2%) 늘어났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위축됐던 유럽 M&A가 확연한 회복세다.
유럽 M&A 시장의 가장 큰 손은 역시 미국. 사모펀드와 헤지펀드를 앞세운 미국 금융자본이 유럽 은행들이 내놓은 자산을 헐값에 사들이고 있다. GE캐피탈이 스코틀랜드왕립은행(RBS)의 독일과 프랑스 팩토리 사업 부문을 인수했고, 웰스파고는 아일랜드자산관리공사로부터 담보대출을 사들였다. 기업 M&A도 활발하다. 올 들어서 국제화물 특송회사인 UPS가 네덜란드의 경쟁사 TNT익스프레스를, IT회사 시스코시스템즈가 영국의 비디오 소프트웨어 회사인 NDS그룹을 인수했다. 특히 미국 기업들은 아프리카나 중동 등 신흥국 시장에 사업기반을 갖고 있는 유럽기업들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일본은 엔화 강세에 따른 수출경쟁력 약화를 만회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유럽 M&A를 적극 지원한다. 일본국제협력은행(HBIC)은 1,000억달러 펀드를 조성해 저리로 M&A 자금을 대출하고, 일본무역진흥기구(JETRO)은 현지 조사나 자문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다케다제약이 스위스 니코메드를 140억달러에 인수하는 등 2010년 이후 굵직한 유럽기업 M&A건만 5건에 달한다.
중국은 최근 일본을 능가하는 유럽 사냥꾼으로 부상했다. 중국의 해외 M&A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이 2010년 10%에서 작년에는 34%로 대폭 증가했을 정도. 특히 중국 국영기업과 국부펀드의 중국기업의 유럽시장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항만과 물류 인프라 투자를 늘리는 추세다.
미국 일본 중국 등이 치열하게 유럽 사냥에 나서고 있는 반면,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움직임은 미미한 수준이다. 2008년부터 작년까지 4년간 78건에 98억달러의 M&A를 성사시켰지만, 이는 같은 기간 일본과 중국의 20% 수준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한국석유공사의 영국 석유 탐사회사 다나 인수, 국민연금의 런던 HSBC타워 매입 등 공공기관이 대부분이다.
유럽기업들의 높은 잠재력을 고려할 때 지금처럼 유럽 M&A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면 미국과 일본은 물론 중국과의 기술 경쟁에서도 뒤쳐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 김득갑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전문위원은 "정부는 유럽 기업 M&A가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점을 인식하고 지원책을 강화해야 한다"며 "수출시장으로서보다 원천기술 확보를 위한 M&A 시장으로서 유럽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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