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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몰락한 방통대군, 비리만 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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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몰락한 방통대군, 비리만 죄인가

입력
2012.04.24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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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말 그대로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다. 예고도 없이 약속에 20여분을 늦고도 미안해하는 기색조차 없었고, 초면이 여럿인 참석자들에게 누구 할 것 없이 "어, 그래", "너는…"하며 하대로 일관했다. 기자 출신 대선배라니 그럴 수도 있으려니 했던 건 여기까지. 민감한 현안들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마지못해 몇 마디 답하던 그는 "밥도 먹기 전 질문을 해대다니 에티켓도 모르냐"며 버럭 호통을 쳤다. 날 선 언쟁이 이어졌다. '방통대군'으로 불리던 그에겐 기자의 질문조차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 듯했다.

재작년 가을 최시중 당시 방송통신위원장과 몇몇 기자들의 간담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졸지에 '천하에 예의 없는' 기자로 몰린 내가 더 황당했던 건 그 이후 벌어진 일이다. 그날의 '사건'은 입소문을 타고 방통위 안팎으로 퍼졌고, "겁도 없이 권력 실세와 맞짱 뜬 기자"라거나 "속 시원했다"는 반응들이 들려왔다. 그가 생사여탈권을 쥔 방통위나 관련 업계 사람들은 물론 방송사, 그리고 방송 진출을 노리던 신문사의 기자들조차도 눈치 보기에 급급할 정도로 대단한 권세를 누려왔다는 얘기였다. 씁쓸했다.

지난 1월 측근의 비리 의혹으로 자진 사퇴한 최 전 위원장이 거액 금품수수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됐다. 이미 숱한 MB맨들이 줄줄이 쇠고랑 차는 걸 본 터라 사건 자체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는 돈 받은 사실을 '당당히' 밝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세간의 분석처럼 청와대를 물고 들어가겠다는 심사인지, 그 여파가 어디까지 갈지는 두고 볼 일. 내게 더 놀라운 것은 마치 "대통령 만들어 준 게 누군데…"라며 대놓고 외치기라도 하듯 거침없이 쏟아낸 인터뷰 발언 곳곳에서 드러난, 그의 여전한 '대군' 마인드다.

그는 방통위원장 시절에도 '킹 메이커'로서의 자부심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출범 초 방통위를 담당한 한 기자가 쓴 이란 책에는 그가 기자들을 모아 놓고 이런 말을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MB가 미국서 돌아왔다기에 강남 어딘가, 그 친구가 지었다는 건물로 만나러 갔어. 건물로 들어서려는데…, 간판에 '영포빌딩'이라고 쓰여 있더라고! 그때 결심했지, 이 친구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모든 걸 걸어도 되겠다고." 그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해 의아해 하는 기자들에게 그는 손짓으로 방점까지 찍어가며 "그게 '영일'하고 '포항'을 합친 말이잖아"라고 설명해주는 친절까지 보였다고 한다.

고향 후배 대통령 만들기에 "모든 걸 걸었다"던 그는, 그의 이번 고백을 빌리자면, 역시 그 끈끈한 '영포' 인맥을 활용해 얻어낸 뒷돈으로 그 꿈을 이뤘다. 방송과 통신에 관한 전문성은 고사하고 합의제 기구의 수장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덕목인 정치적 독립과 균형감각조차 결여한 그가 하고 많은 자리 가운데 방통위원장을 꿰찬 데는 언론을, 특히 방송을 틀어쥐지 않고서는 정권 유지가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거라는 분석에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가 '방통대군'으로 등극한 뒤 방송계 인사와 각종 인허가에서 '우리가 남이가'식으로 밀어붙인 숱한 일들을 보라.

벌써 85일째 파업 중인 MBC를 비롯해 낙하산 사장 퇴진과 공정성 회복을 외치며 거리로 나선 KBS, YTN, 연합뉴스 등 언론사들의 사상 유례없는 무더기 장기파업 사태는 해결 기미 없이 계속되고 있다. 정연주 전 KBS 사장에게 억지 배임 혐의를 씌워 몰아낼 땐 그리도 발 빠르게 움직이던 권력자들이 이번 파업 사태엔 "방송사 내부 일"이라며 뒷짐만 지고 있다. 지난 총선 과정에서 파업을 틈타 더 노골적인 편파성을 드러낸 방송 보도의 덕을 톡톡히 본 새누리당도 시종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최 전 위원장을 비롯해 개인 비리로 줄줄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MB맨들이 그 죗값을 치른다 해도, 그들이 망가뜨린 언론 환경을 회복하는 일은 요원하기만 하다. 참 잔인한 4월이다.

이희정 문화부장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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