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구태가 그리울 때도 있다. 없어진 낡은 관행이지만 가끔은 되살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선거 때면 나오던 선심성 정책 얘기다.
평소 조용하던 정부도 선거를 앞두고서는 항상 크고 작은 정책들을 쏟아 내곤 했다. 조세감면, 금리인하, 요금인하…. 한결같이 중산ㆍ서민층에 부담은 덜어주고 혜택은 늘리는 내용들이었다. 말이 민생정책이지, 여당을 도와주려는 꼼수라는 건 세상이 다 알았다.
엄밀히 말하면 행정부가 선거중립의무를 어긴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차피 정부 여당이 한 몸이던 터라, 선거 전 선심성 정책은 '여당 프리미엄'정도도 여겨졌다. 선심의 정도가 너무 노골적이거나 과도하지 않는 한, 야당도 그러려니 했다. 수혜자가 중산ㆍ서민층인데, 내놓고 비판하기도 힘든 면도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선거용 선심정책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MB정부 들어서는 두 차례 총선과 한 차례 지방선거, 그 사이사이 여러 재ㆍ보궐선거가 있었지만 특별히 선심성이라고 할 만한 정책이 나왔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만약 예전 관행대로였다면, 지난 4ㆍ11 총선을 앞두고 정부는 한 보따리의 민생정책을 내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유류세 인하는 반드시 포함됐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도 그럴 것이 고유가보다 더한 민생고는 없는데 그 대책이 빠질 리 없고, 서민들의 기름값 부담을 가장 확실하게 덜어줄 유류세 인하는 표심을 잡는 데 최적의 카드이기 때문이다.
정부 여당의 관계가 좋았더라면, 아니 역대 정권 때 수준만 됐더라도, 유류세 인하는 정말로 현실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정'이란 말 자체가 어색하게 들릴 만큼 남보다 더한 사이가 되면서, '여당지원용 정책'은 서로 꿈도 꾸지 않았던 것 같다. 결코 바람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선거를 앞두고 뭔가 나오길 기대했던 서민들로선 공복감만 느껴야 했다.
선거가 끝나고 일주일이 지난 19일 정부는 유가관련 대책을 내놓았다. 정유 4사(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가 과점 하는 석유시장에 삼성계열 석유화학회사(삼성토탈)을 참여시켜 경쟁을 촉진시킨다는 것이 골자였다.
좋은 얘기다. 유통구조를 경쟁적으로 바꾸는 것이야 말로 가장 시장친화적인 가격안정정책이란 사실에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유사를 반쯤은 협박해 딱 100일 동안 가격을 떨어뜨렸던 작년 이맘때에 비하면, 정부의 유가정책은 훨씬 진화된 셈이다.
하지만 경쟁이 실제 가격인하로 이어지려면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서민들은 당장 하루하루가 버거운데 이런 중장기대책으로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가격인하효과가 리터당 30~40원 정도라는데 누굴 놀리는 건지. 더구나 최대한 생산해도 차량용 휘발유소비량의 2% 밖에는 공급하지 못하는, 정식 정유회사도 아니고 정제시설조차 없는 석유화학회사를 억지로 끌어들여 놓고 '제5의 휘발유공급자 등장'운운하는 건 차라리 말장난에 가깝다.
달리 방법이 없다. 물론 유류세를 낮추면 세수는 줄어들고 다른 재정사업추진에 차질이 오는 건 맞다. 하지만 재정지출의 우선순위는 조정하면 된다. 4대강은 태초부터 최우선 재정사업이었나. 생계형 서민운전자들에게 기름값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복지가 아닌가.
무차별적으로 다 깎아주자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힘든 서민만 골라서 혜택을 주자는 건데 이조차 거부하는 정부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운전자들에겐 생계와 생존의 문제인데 정부관료들은 자꾸 효과와 효율 얘기만 하고 있으니, 이건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밖에는 안 된다. 이러고도 스스로를 친서민 정부라 부르는 배짱이 부러울 따름이다.
오죽하면 선거에 편승해서라도 기름값이 낮아지길 바랄 까 싶다. 정말로 답답하고 안타까울 노릇이다.
이성철 산업부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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