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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을 다시 말한다] <7> 긴 감옥살이와 전향 공작을 이겨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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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을 다시 말한다] <7> 긴 감옥살이와 전향 공작을 이겨내다

입력
2012.04.20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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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가을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체포돼 고국으로 압송된 죽산은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가 갇힌 신의주형무소 독방은 매우 추웠다. 밤새 덜덜 떨며 잠을 못이루고 낮에도 웅크리고 앉아 떨면서 바늘을 들고 걸레를 깁는 노역을 했다. 젊은 시절 걸린 손가락 동상이 재발해 진물이 흘렀다.

고향에서 비보가 왔다. 그가 체포당한 뒤 딸을 안고 상하이에서 귀국한 아내 김이옥이 강화 신문리 친정집에서 폐결핵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한 것이다. 절망과 회한으로 식음을 끊었던 그는 어린 딸을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스스로 모범수가 되어 형무소에 순응하며 몇 해가 지나갔다. 걸레 깁기 한 가지 노역만 했기 때문에 그는 형무소 내 보철공(補綴工)의 권위자가 됐다. 그러는 동안에도 수많은 수인들이 견디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조봉암을 전향범으로 몬 박헌영

1930년대 후반, 일제는 사상범 전향 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조선은 사회주의가 독립 투쟁의 수단이 돼 있고 소련과 국경이 닿아 있어 본토보다 더 엄중했다. 사회주의 운동 경력자에게 다시 체포한다고 위협해 전향서를 쓰게 하고, 형무소의 사상범에게도 협박을 했다.

신의주형무소는 거물 조봉암에게 전향 공작을 집중하고 재소자들은 그를 주목했다. 그는 전향을 거부했다. 자신의 생애 전부를 부정하는 일이므로 죽어도 전향은 할 수 없었다. 많은 사상범들이 전향해 나갔으나 그는 묵묵히 모범수로 지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가 가석방으로 풀려난 것은 1939년 7월, 마흔한 살 때였다. 일본 황태자 탄생 기념 은사(恩赦) 조치로 1년이 감형된 것이지만 날짜를 따져 보면 감형도 아니었다. 1932년 7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 프랑스공원에서 체포됐으니 꼭 7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된 것이었다.

죽산의 1년 조기 석방에 대해 8ㆍ15 광복 후 박헌영 등은 '신의주형무소에서 전향 성명을 내고 상표를 타고 출옥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죽산은 전향하지 않았다고, 당시 신의주형무소에 있었던 박헌영 편의 젊은 동지들에게 확인하라고 반박했다.

죽산이 전향 성명서를 쓴 기록, 상을 받은 기록은 없다. 출옥 직전인 1938년 말의 한 관헌자료는 신의주형무소에 수감 중인 사상범이 52명이며 중일전쟁(1937년 7월) 전 전향이 15명, 전쟁 후 전향이 23명으로 전향자는 총 38명이라고 기록했다. 심경불명은 14명, 비전향은 한 사람도 없는 것으로 기록했다.

자료를 사실로 믿는다면 죽산은 심경불명으로 분류된 셈이다. 비전향이지만 순응하는 모범수라 실적을 올리기 위해 그렇게 기록했고 가석방 조치도 그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박헌영 등의 비난은 유력한 경쟁자인 죽산을 밀어내기 위한 책략이었던 것이다.

박남칠의 도움으로 인천에 정착

감옥에서 나온 죽산은 인천으로 갔다. 딸이 인천에 사는 먼 친척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인천에는 사회주의 운동을 한 후배 박남칠이 있었다. YMCA 중학부 시절 그를 따랐던 박남칠은 일제의 회유를 물리치지 못해 전향을 했지만 인천 미곡상조합 조합장으로서 상공업계의 거물, 존경 받는 지역 유지로 성장해 있었다.

죽산은 인천 소화정(昭和町ㆍ지금의 부평구 부평동) 39번지에 집을 얻었다. 가게 터가 앞에 있고 뒤에 방 하나와 부엌이 붙은 작은 집이었다. 일제 관헌자료에 죽산이 여기 산 기록은 있으나 생업에 관한 내용은 없다.

죽산은 가을에 첫 아내 김조이와 재결합했다. 김조이는 모스크바공산대학 후배인 김복만(金福萬)과 재혼하고 국내에 잠입해 투쟁하다가 체포돼 3년 간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고 나와 있었으며, 김복만과는 헤어진 상태였다.

죽산 부부는 딸 호정을 데리고 경남 창원 김조이의 친정을 찾아갔다. 젊은 나이에 결혼했다 헤어져 각기 다른 여자, 다른 남자와 살고 감옥에 다녀왔는데 이제는 잘 살겠다고 다짐하기 위해서였다.

죽산은 생활의 안정을 찾고, 박남칠의 배려로 지난날 인천에서 청년활동을 하여 자신과 이어졌던 동지들과 교유하기 시작했다. 김용규(金容奎) 이보운(李寶云) 유두희(劉斗熙) 권평근(權平根) 등 주로 미곡계통에서 일하며 인천 사회운동의 명맥을 은밀히 이어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인천미강업(米糠業)조합을 설립해 죽산을 조합장으로 추대했다. 미강업이란 겨를 취급하는 업종이었다. 미곡상조합에서 하던 일인데 순전히 죽산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분리한 것이었다. 조합 사ソ퓻〈?사복 형사가 상주하다시피 하며 감시했고 어쩌다 경성에 가면 감시원이 따라붙어 움쩍할 수도 없었다.

1940년 1월 5일 기업인들이 매일신보에 낸 '흥아신춘(興亞新春)'이라는 신년광고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인천부(仁川府) 본정(本町) 내외미곡직수입 성관사(誠寬社) 조봉암 방원영'. 하지만 그와는 무관한 회사였다. 신문사로 달려가 따지고 싶었으나 참았다. 매일신보는 총독부 기관지였고 그렇게 그의 이름을 끌어들인 게 경찰 공작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1941년 일제는 조선사상범 예비구금령을 공포했다. 죽산 같은 비전향 사상범을 제멋대로 구속할 수 있는 제도였다. 그해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뒤에는 곳곳에서 시국좌담회를 열어 지도자들을 강연 단상에 세웠으며 국방헌금을 내게 했다. 일제의 촉수는 죽산에게 다시 뻗쳐왔으나 일제와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던 박남칠이 몸으로 막아 주었다.

매일신보의 국방헌금 사건

1941년 12월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매일신보에 그가 국방헌금을 냈다는 기사가 난 것이다.

인천 서경정(西京町) 조봉암 씨는 해군부대의 혁혁한 전과를 듣고 감격하여 지난 20일 휼병금으로 금 150원을 인천서(仁川署)를 통하여 수속하였고(매일신문 1941년 12월 23일자)

죽산은 신문을 읽고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필자는 조호정 여사에게 이 일을 아시느냐고 물었다. 여사는 털썩 주저앉으신 것밖에 알지 못하며 서경정(현재의 중구 내동)에 산 적이 없다고 했다. 인천의 원로들에게도 물었다. 물가비교를 하면 150원은 당시 쌀 7가마니 값이라 했더니 원로들은 죽산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다 지난해 봄, 죽산의 농림부장관 시절(1948년) 비서관이던 조병선 선생을 만났다. 선생은 죽산의 죽마고우인 조광원 성공회 사제(司祭)의 아들, 문화부장관을 지낸 수필가 조경희 선생의 동생이다. 선생은 부산 임시수도 시절인 1952년 여름 죽산이 남포동 냉면집에서 부친과 30여 년 만에 해후하는 자리에 동석했던 이야기를 필자에게 들려주었다. 그때 죽산은 국회부의장이었다.

두 분은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독립운동 이야기가 많았다. 조광원 신부도 국민훈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다.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자공훈록'에 의하면 하와이에서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냈고 2차 대전 때 미군 군종 신부로서 사이판 전투에 종군해 선전공작을 맡기도 했다.

죽산은 조 신부에게 신의주형무소 이야기를 하던 끝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석방되어 미강조합장 자리 하나 붙잡고 살 때도 보통 시달린 게 아니야. 신의주형무소보다 더 힘들었어. 전향하라고 위협하고 걸핏하면 국방성금 내라 독촉했어. 한번은 미강조합도 국방헌금을 내라 해서 돈이 없다 했어. 미곡상조합에서 대신 내겠다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내가 낸 걸로 신문에 났어."

필자가 조병선 선생을 만나고 얼마 후, 국가보훈처는 죽산의 유족이 낸 서훈신청을 위의 매일신문 기사를 들어 유보한다고 통보했다.

필자는 죽산이 국방헌금을 내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냈다면 선전도구가 되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고 강연회에 불려 다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뒷날 박헌영 일파가 그를 축출하려 맹공격할 때 온갖 트집을 잡아 험담을 하면서도 그 기사에 관해 한 마디도 안한 때문이다. 국가보훈처 일도 있으므로 필자는 조병선 선생의 말을 녹취하고 곧 출간할 책에 자세히 쓸 작정이다.

예비검속령으로 끌려가다

죽산은 1942년 초 부평을 떠나 도산정(桃山町ㆍ현재의 중구 도원동) 공설운동장 위쪽 동산에 지어진 부영(府營)주택으로 이사했다. 조호정 여사 말에 따르면 친구 소유의 집이었다. 조 여사가 당시 인천 다운타운에 있는 박문보통학교에 다니던 터라 옮긴 것이라 했다.

세월은 흘러갔다. 그러나 죽산은 결국 1945년 1월 예비검속령에 의해 용산헌병사령부로 끌려갔다. 처남 김영순(金永淳)이 인천에서 회사원으로 일했다. 이름난 축구선수이기도 했다. 마침 일요일이라 공설운동장에 갔다가 점심 얻어먹을 생각으로 매형 댁으로 올라갔는데 누나 김조이가 붙잡고 통곡했다.

"조금 전에 매형이 끌려갔어. 이번엔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야."

필자는 지난해 6월 경남 창원 김조이 여사 생가 터를 답사하고 91세로 생존해 계신 김영순 선생을 만났다. 선생이 죽산의 처남이긴 하지만 그 말을 하시는 눈빛에서 진정성을 읽은지라 죽산이 일제에 굴복해 전향하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원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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