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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예술가의 여행'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바로크 거장 루벤스는 없었다

입력
2012.04.20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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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여행/요아힘 레스 지음ㆍ장혜경 옮김/웅진지식하우스 발행ㆍ304쪽ㆍ1만 6,800원

대문호 괴테가 이탈리아 전역을 2년여간 돌아보며 남긴 여행기는 세상과 직접 부대끼며 진정한 예술가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17세기, 괴테의 여행은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여행의 열병을 앓게 한 일종의 티핑 포인트가 됐다. 당대 예술가들에게 여행은 또 다른 형태의 공부이자 교류의 장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여행은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힘이 있다. 누군가는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해, 또 다른 이는 수평선 너머의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해 길을 떠난다. 시각적인 감각만큼은 누구보다도 빼어났던 화가들은 무엇을 보기 위해 떠났으며, 길 위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독일의 정통 미술사가 요아힘 레스는 <예술가의 여행> 에서 15~20세기 초 여행에 매혹된 13명의 화가들이 앞서 떠난 길을 추적한다. 저자는 이들의 여행 동기를 개인적인 이유와 시대의 흐름이란 두 가지 축으로 살핀다. 책을 읽다 보면 예술가들의 눈과 발걸음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근대사와 미술사를 훑게 되는 이유다.

15세기의 화가는 왕국 간의 소통과 정치적 협상의 매개자 역할을 했다. 군주는 선물수송 책임자 겸 외교 사신으로 그들을 활용했는데, 플랑드르(지금의 벨기에, 네덜란드)의 무명화가였던 루벤스는 영국과 이탈리아, 스페인을 이런 식으로 넘나들며 바로크 미술의 거장으로 명성을 날리게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빼어난 재주를 가졌던 그는 군주를 영웅이자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각색할 줄 아는 노련한 정치인의 면모 또한 갖추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7세기 말 산업혁명과 시민계급의 해방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여행자의 등장도 이끌었다. 남미대륙의 북동해안에 자리한 수리남, 오직 설탕을 위해 그곳으로 향하던 시대에 독일의 화가 겸 과학자인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은 딸과 함께 곤충을 그리러 떠난다. 그녀가 재산을 털어 짐을 싼 이유는 단 하나, '유충이 나비로 변태하는 과정'을 탐구하기 위해서였다. 2년에 걸쳐 고온 다습한 그곳에서 살다 온 그녀는 '신께서 아메리카에서 창조하신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남미의 동식물을 환상과 실제가 어우러진 그림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19세기 이후 교통의 발달로 유럽에서의 대륙 간 이동은 활발해졌다. 여기에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발견한 이국적인 식민지는 예술가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는데, 파리 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폴 고갱 역시 태초의 순수성을 간직한 식민지에 매료된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안제도의 타히티에 정착한 폴 고갱은 열대의 강렬한 색채를 화폭에 담으며 비로소 자신의 예술혼을 꽃피운다.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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