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보면 많은 분들이 도와주러 다가와요. 정말 감사하죠. 하지만 앞이 안 보이니 잠시 헤매는 듯한 포즈를 취하긴 해도 실제로 저희는 괜찮을 때가 많아요. 그때 갑자기 도움을 주러 다가오시면 오히려 더 놀라죠. 저희가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게 시각장애인에 대한 친절이랍니다."
영어 교사가 꿈인 숙명여대 교육학부 3학년 윤서향(21)씨에게 "비장애인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묻자 윤씨가 주저하지 않고 내놓은 답이다.
윤씨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다. 세상은 그에게 온통 암흑이다. 하지만 시각장애인 특수학교인 서울맹학교에서 12년간 공부한 그는 2010학년 숙명여대 정시 모집 전형에 응시해 합격했다. 장애인 특별전형이 있는 다른 대학들을 애써 외면하고 지원한 끝에 얻은 값진 성과였다. "장애가 없는 학생들과 경쟁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선인장이 사막이라는 환경을 견디기 위해 가시가 생겼듯이 저도 한계를 극복하면서 더 강해지는 느낌이에요."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여건보다 또래 학생들과 당당히 겨루고 싶었던 윤씨였다. 그는 지난해 2학기 4.5만점에 4.36의 학점을 받아 교육학부에서 1등을 했다. 남보다 두 세배 피나는 노력을 한 결과다. 물론 좌절감을 느끼는 순간도 숱하게 많았다. 고교 때까지는 점자 교과서나 책이 보급됐지만 대학에선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1학년 첫 학기에 마음 놓고 볼 수 있는 책이 한 권도 없었어요. 장애를 떠나 온전히 공부로 경쟁하기 위해 입학했는데 교재를 못 구했던 게 가장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윤씨는 더 이상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윤씨가 입학한 2010년 5월 숙명여대에 장애학생지원센터가 개설됐기 때문이다. 재학생 20명으로 구성된 장애학생 서포터는 윤씨의 강의를 돌아가며 함께 듣고, 강의실 안내는 물론 필기까지 돕고 있다.
장애학생 서포터들이 장애인의 날(20일)을 하루 앞둔 19일 윤씨 곁을 지켜주는 루시에게 감사의 선물로 사료를 전달하는 행사도 가졌다. 4살짜리 리트리버종인 루시는 그에게 안내견이라기보다 동반자다. 행사를 기획한 김주영 장애학생지원센터 팀장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업에 열중하는 윤씨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윤씨는 매주 한 번 모교인 서울맹학교를 찾아간다. 교직 이수를 위한 교육 봉사 차원이지만 후배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 너무 기쁘다. 다만 후배들의 대학 진학 상담을 할 때면 마음이 아프다. "후배들이 꼭 대학을 가면 좋겠어요. 그런데 정보가 많이 부족해요. 대학에 입학하려면 어떤 공부를 더 해야 하는지, 어떤 전형을 통해 응시할 수 있는지 모르는 후배들이 많아요." 그래서 윤씨는 후배들의 '멘토' 역할도 함께할 계획이다.
그는 서울맹학교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곧잘 힘이 되는 말을 자신이 좋아하는 영어로 해준다고 한다.
"My dear juniors, a really strong person is not a person who survived just survive. Then what a really strong person is a person who never gives up. Never give up although you have difficulty, then you can win. (사랑하는 후배들아 진정 강한 사람이란 단순히 살아남은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야. 진정 강한 사람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야. 장애가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은 뭐든 해낼 수 있어.)"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라서 후배들의 마음에 더 와 닿을 터였다.
김현빈기자 hb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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