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1. 이신통을 찾아서 <15>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1. 이신통을 찾아서 <15>

입력
2012.04.19 17:32
0 0

엄마는 역시 옥황상제의 따님인지 앉아서 남의 속내를 다 아는 모양이었다. 십일 월 초순의 어느 날, 방울이 쩔렁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세마를 탄 오 동지가 문 앞에서 내려 마당 안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나는 찬방에서 내다보고는 얼른 부엌을 지나 뒤채로 건너가, 툇마루에서 호박고지를 손질하고 있던 엄마에게 일렀다.

오 서방이 왔어요. 나 없다구 그래.

내 뭐라던?

엄마는 신을 제대로 꿰지도 못하고 치맛귀를 싹 감아쥐고는 재빨리 앞마당으로 돌아나갔다. 나중에 들은 대로 이러루한 말이 오갔다.

장모 평안하신가.

사위가 꼴에 반상 구별이라고 하게를 하자 엄마는 일부러 딴청을 부린다.

거 무슨 입에 발린 장모인지 노루털인지…… 누구시던가?

삼례 사는 오 동지를 잊었는가?

아무리 사위가 반자식이라 하나, 내 딸 채간 뒤로 석 삼 년이 지나도록 콧구멍도 안보이더니, 이제 무슨 일로 왔나?

오 동지는 견마잡이로 따라온 하인에게 눈짓을 했고, 녀석이 엄마에게 보자기로 싼 고리함을 두 손으로 바치듯 한다.

이게 뭐야, 소박 놓고 뒤늦게 이별전 가져왔나?

어허, 장모 노여움을 푸시게. 그게 연옥이 쓰던 방물들이라 내가 수습하여 가져왔구먼. 처갓집을 찾노라고 곁꾼을 풀어 강경 진을 이 잡듯 하였다네.

엄마는 우선 함을 받아 내다보던 중노미 장쇠에게 넘겨주고는, 대청 앞을 가로막고 팔짱을 끼고 서서 을러대듯 말하였다.

내 그렇잖아도 독수공방에 화적떼에 온갖 고초를 겪은 우리 딸이 소박을 맞아 맨손으로 돌아왔으니, 전주 감영에 소장이라도 올릴까 하던 중이여. 연옥이는 이미 남남이라 다시는 찾을 생각 마소.

본인의 말을 듣고 싶으니 상면이나 하게 해주오.

풀이 꺾인 오 동지가 그렇게 중얼거려 보건만, 엄마는 냅다 소리를 지른다.

얘 장쇠야, 소금 갖구 와라.

누구 영이라고 거역하랴, 장쇠가 부엌에서 꽃소금을 단지째로 갖다 바치고, 엄마는 소금단지를 옆에 끼고 일사천리로 내지른다.

내가 누구여, 기생어미 아닌가베. 집에 두기 남세스러워서 그년을 저어 부여로 개가시켜 보냈다네. 부귀빈천이 물레방아라, 이제 팔자를 고쳤으니 망신당하지 말구 돌아가소.

말을 마치자 엄마는 미운 털 박힌 사위짜리에게 소금을 마구 뿌린다.

허 쉬이, 썩 물러가라 물러가!

오 동지는 얼굴과 옷자락에 사정없이 날아드는 소금을 막노라고 두 팔을 휘저으며 뒷걸음질치다가 달아나버렸다.

그해 겨울부터 대목을 부르고 미장이를 사서 뒷마당의 초가를 헐고 앞채와 같은 규모의 별채를 올렸고, 대문 옆에 문간방과 마방과 창고를 연이어 지었으며, 측간도 내외 구분하여 서쪽 담 모퉁이에 달아내고, 뒷담에 문을 내고 텃밭을 사들여서 대나무 울타리를 둘렀다. 공사는 봄이 되어서야 끝났는데, 이제야 내로라하는 객점의 규모가 갖추어진 셈이다. 정월 대보름날 마음이 뒤숭숭하여 옥녀봉에 올라 쌍폭 돛대를 세운 조운선이 떠가는 금강을 내려다보았다. 엄마가 이신통의 소식을 말해주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 집이 강경으로 이사 온 뒤에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호서의 가장 큰 장터인 이 고장에 연희패들과 함께 찾아와서 다리목 객점에 묵었다고 한다. 작년에는 대보름 때에도 왔지만 단오에도 왔다고 하였다. 엄마는 내 얘기는 모른 척하고 꺼내지도 않았다는데, 언젠가 신통이 술을 좀 마신 뒤에 시집간 연옥이는 잘 사느냐고 묻더란다. 잘 살다 뿐인가, 곡간에 든 생쥐 팔자인데, 하였더니 술만 벌컥벌컥 마셨다나 뭐라나.

그리고 또한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갔고 나는 스물두 살이 되었다. 기생으로 치면 환갑이 스무 살이오, 퇴기 서른이면 손자를 본다는데, 자식도 없이 소박맞고 친정에 돌아와 객점이나 거들고 있는 신세였다. 한 번 내친 살림, 두 번 세 번 거듭된다더니, 인근 저자의 객주 상고들 가운데는 돈푼이나 모은 사내가 많아 은근히 엄마에게 조르고 떠보는 이가 여럿이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