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장이식 수술이 성공한 지 꼭 8년 되는 날이었다. 소장을 이식 받은 엄마도, 소장을 떼어준 딸도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딸은 지난해 결혼해서 지금 만삭이다.
모녀에게 새 삶을 선물한 의사는 이명덕(64) 서울성모병원 소아외과 교수다. 그 뒤로 이 교수의 손을 거쳐 건강한 장을 얻은 환자들이 먹고 싶은 음식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행복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그 행복을 장이 너무 짧거나 없는 이들에게 줄 수 있게 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소장이식 초기에 범법자 취급
"소장이식 시작 당시엔 불법 아니냐는 논란도 있었어요. 장기이식법(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에 소장은 아예 들어 있지도 않았으니까요. 법이 과학을 따라가지 못한 거죠. 죽을 수밖에 없던 환자가 소장을 이식 받고 멀쩡히 살았는데도 범법 운운하니 황당했죠."결국 2007년 법이 바뀌었다. 이식을 허용하는 장기로 소장이 추가됐다. 결국 우리나라에선 2000년대 후반이 돼서야 소장이식이 '공식적으로' 가능해진 셈이다.
다른 장기에 비해 소장이식은 세계적으로도 발전이 더뎠다. 1960년대에 브라질에서 처음 소장이식을 받은 사람을 포함해 1970년대 중반까지 모두 6명의 이식자가 모두 밥 한번 먹어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한동안 국제 이식학계에선 소장은 안 된다는 인식이 퍼졌다.
"1980년대 중반 미국 피츠버그의대에서 교환교수로 일하면서 실험용 쥐로 시도를 해봤어요. 역시 번번이 실패했죠. 30대 젊은 나이였는데 스트레스 때문에 흰머리가 다 나더군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쥐가 살기 시작한 거에요. 되겠다 싶어 원숭이로도 시도했죠."
아니나 다를까 1987년 독일이 소장이식 받은 사람을 처음으로 살렸다. 프랑스와 캐나다, 미국도 잇따라 성공했다. 미국서 소장이식 기술을 배운 이 교수는 국내 환자도 살릴 수 있겠다 확신했다. 하지만 예상 못한 벽에 부딪혔다.
"환자가 수술을 받을 수 있는 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거에요. 1980년대 후반 국내 영양학 수준이 그만큼 떨어졌단 소리죠. 병 때문에 장을 많이 잘라냈거나 선천적으로 장이 극히 짧은(단장증후군) 사람들은 정맥주사로 계속 영양분을 공급받다 적절한 시기에 소장이식을 받아야 하는데, 그 기간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별 수 없었다. 뜻 있는 의사와 약사, 영양사, 간호사를 모아 영양집중지원팀을 만들었다. 단장증후군 환자가 집에서도 스스로 영양관리를 할 수 있도록 약을 만들고 교육을 시켰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소장이식이 가능할 만한 환자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소장은 단순히 넣고 이어줬다고 해서 이식이 끝난 게 아니에요. 환자가 주사 끊고 밥 먹고 살 붙는 걸 봐야 성공이라고 할 수 있죠. 그 첫 사례가 바로 8년 전 모녀입니다."
아이 살리는 소장 길이 최소 1m
이 교수는 어린이에게로 눈을 돌렸다. 어른 소장이식에 성공한 지 1년 반 지나 소아 소장이식도 첫 테이프를 끊었다. 3살짜리 여자아이에게 아버지 소장을 잘라 넣어줬다. 6년 동안 보통 아이들처럼 잘 먹고 잘 자라고 학교도 다니다 안타깝게도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만성면역거부반응 때문이었어요. 소장이식에서 아직 완벽히 해결하지 못하는 게 바로 이겁니다. 거부반응으로 변형된 부분을 다시 수술로 잘라내고 회복시켰는데, 남은 장이 80㎝도 안 되다 보니 다시 단장증후군이 되고 말았죠."
어린이가 건강을 유지하려면 소장이 적어도 1m는 있어야 한다. 어른은 더 필요하다. 만약을 위해 장을 충분히 이식해주려면 산 사람 장을 떼주는 생체이식 말고 뇌사자의 장을 넣어줘야 한다. 2009년 국내 첫 뇌사자 소장이식도 이 교수의 몫이었다.
"항문 근처 직장만 7, 8㎝ 남아 있던 20대 여성에게 뇌사자 소장 전체와 대장 일부를 이식했어요. 지금까지 별 문제 없고 건강상태도 상당히 좋습니다."
소장은 배를 갈라도 계속 꿈틀거리기 때문에 고정돼 있는 다른 장기보다 이식이 어렵다. 소장 주위 혈관을 보통 수술처럼 연결해 놓으면 움직이다 막혀버릴 수 있다. 여유분을 두고 정밀하게 이어줘야 한다. 면역거부반응도 강한 데다 장이 없는 동안 줄었던 뱃속 공간에 새로 소장을 넣으면 혈액순환이 제대로 안 되기도 한다. 어린이 소장이식은 더 어렵다.
"장이 너무 작으니까요. 맨눈으로는 혈관 못 잇죠. 현미경으로 봐야 해요. 또 수술실 안에서 마취한 상태로 모든 걸 완벽하게 끝내야 해요. 아이가 어릴수록 수술 후 뭔가 추가 처치를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마취가 풀리면서 아기가 갑자기 울고 보채기라도 하면 수술 부위에 문제가 생겨 자칫 재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도 생겨요."
소장이식의 성패는 환자가 얼마나 빨리, 잘 먹게 되느냐에 달려 있다. 어른이야 "먹어 보세요" "어떠세요" 할 수 있지만 말 못하는 아穗?일일이 먹여주고 상태를 직접 살펴봐야 한다. 장기이식뿐 아니라 웬만한 수술은 어른보다 어린이가 더 어렵다.
"어른을 주로 수술하는 의사는 어린이 수술을 못 하죠. 반대로 어린이를 수술하는 의사는 어른 수술도 가능해요. 실제로 소아외과 훈련과정 중엔 외과의 모든 수술을 배워야 하죠. 하지만 국내에선 소아 수술의 특수성이나 난이도를 여전히 잘 인정해주지 않아요. 소아외과를 별도로 둔 병원도 많지 않고 대한소아외과학회 정회원은 약 60명뿐이에요."
"기형? 그런 말 안 써요"
이 교수를 비롯한 소아외과 전문의 2세대가 최근 가장 관심을 갖는 분야는 태아수술이다. 아기가 자궁에 있을 때 미리 수술을 해준다는 얘기다.
"임신 중 자궁을 열고 태아를 꺼내 수술한 다음 도로 넣어 만삭을 기다렸다 낳는다? 옛날엔 상상도 못했죠. 자궁이 굉장히 예민하거든요. 살짝 건드려도 바로 쏟아버리죠(유산)."
하지만 태아용 무전기와 봉합기, 내시경, 초음파가 속속 개발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요즘은 태아의 몸짓이나 소리까지 입체적으로, 실시간으로 보고 들을 수 있다. 태아생리학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소아외과 의사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이 교수는 이 같은 첨단기술을 총동원해 선천성질환센터를 만들었다.
"임신 순간부터 태아를 돌보는 거죠. 이젠 병이 있으면 출산 전이든 후든 아기마다 제일 안전하고 효율적인 시기를 택해 수술할 수 있어요."
엄마 뱃속에서부터 단장증후군뿐 아니라 각종 병이 생기는 아기가 여전히 많다. 태아가 병이 있다고 하면 기형이니 떼야겠다 결심하는 부모 역시 여전히 많다. "너무 안타까워요. 기형이라니요. 그건 괴물이란 뜻이죠. 그냥 태아의 병일 뿐이에요. 부모의 인식도, 사회의 제도도 그 병을 당연히 고쳐줄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해요."
■ 이명덕 교수와 단장증후군 일문일답
후천성이 대부분… 소장길이 늘리는 수술법도
Q. 선천적으로 생기는 희귀질환 아닌가.
A. 소장이 너무 짧아 영양 흡수가 안돼 다양한 증상을 겪는 단장증후군은 태아 때 생기기도 하지만, 환자의 대부분이 후천성이다. 다른 병이나 수술, 외상 때문에 소장을 많이 잘라낸 사람에게 생길 수 있다. 최근 장 질환이 늘면서 후천성 단장증후군도 증가 추세다.
Q. 장이 짧으면 어떤 증상이 생기나.
A. 환자마다 다양하다.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으니 몸무게가 줄거나 빈혈이 생기고, 근육이 약해져 쉽게 피로를 느낀다. 온몸이 붓거나 뼈가 변형될 수 있다. 계속 설사를 하거나, 대변이 미끈거리거나 심한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탈수로 생명이 위험해지는 경우도 있다.
Q. 진단은 어떻게 하나.
A. 짧은 소장 때문에 정상적으로 음식을 먹지 못하면 일단 단장증후군으로 볼 수 있다. 피검사와 빈혈검사, 대변 속 지방 검사 등으로 영양분 흡수 정도를 파악해 확진한다. 소장이 짧으면 가장 부족해지는 영양분이 지방이라 특히 대변 속 지방 검사가 중요하다.
Q. 소장이식밖에 방법이 없나.
A. 심하지 않으면 주기적으로 영양주사를 맞으며 지내기도 한다. 이식 말고 다른 수술법도 있다. 예를 들어 비교적 굵은 소장은 세로로 자르거나 지그재그로 성형해 굵기를 줄이는 대신 길이를 늘리면 음식물이 소장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져 영양분이 좀더 흡수된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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