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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바스켓볼 소년들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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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바스켓볼 소년들은 어디에

입력
2012.04.1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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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는 슬랭덩크요, 미국은 NBA고, 드라마는 마지막 승부며, 잔치는 역시 농구대잔치인 시절이 있었다. 1970~80년대에 태어나 IMF를 유년과 소년으로 통과한 우리는 모두 바스켓볼 소년이었다. 왼손잡이는 허재를 꿈꾸고, 오른손잡이는 이상민을 꿈꾸었다. 마이클 조던과 스카티 피펜의 관계에서 진정한 우정을 발견하기도 했다. 남자아이들은 책상에 앉아 손목을 까딱까딱 움직이며 슈팅연습을 했고, 쉬는 시간이면 제자리 높이뛰기로 점프력을 가늠했다. 여자아이들은 연세대나 고려대의 스타에 열광하며 알록달록한 응원도구를 만들고, 우지원이나 전희철과의 로맨스를 바라며, 심은하가 되는 상상을 하곤 했다.

휴일 아침이면 나는 길거리 농구를 함께하는 친구들에게 삐삐를 치고 동네 공원에 갔다. 그곳이 곧 우리의 아지트였다. 보충수업비나 참고서 값을 명목으로 받아낸 부모님의 피와 살(돈이 아니면 뭐겠는가!)로 최신 농구화와 반바지를 샀다. 조던이나 샤킬 오닐이 새겨진 민소매 티는 이제 막 겨드랑이에 털이 나기 시작한 아이들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거기에 브랜드 로고가 있는 손목 밴드와 '마지막 승부'에서 장동건이 들고 다니던 망치가방까지 들고 다니면 바스켓볼 패션의 완성. 블링블링하고 럭셔리한 바스켓볼 소년의 탄생.

그곳에는 농구 골대를 두고 수 개의 농구공이 난사됐다. 그물은 찢겨나가고 없고, 골대 자체가 약간 기운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뭐 어떤가. 우리는 바스켓볼 사나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1대 1승부를 건다. 나를 포함한 친구 3인방은 칼 말론에게 패스를 하려는 존 스탁턴의 눈길처럼 본능적으로 상대를 찾았고, 우리와 비슷한 실력으로 보이는 다른 3인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3대 3 농구야 말로 바스켓볼 사나이의 전유물이고, 조무래기들은 농구 골대에서 비켜나 구경이나 해야 했다. 그래서 말했다. "좀 비켜라 이것들아, 농구 좀 하자."

공부는 별 볼 일 없었지만 키가 크고 무리지어 다닐 줄 알았던 우리의 말에 녀석들은 순응했다. 가지고 놀던 농구공을 주섬주섬 챙겨, 골대 뒤로 가거나 아예 장소를 옮기거나 했다. '이제야 속 시원하게 멋진 농구를 할 수 있겠군.' 나는 생각했다. 빈 집 마당에서 연마한 하인드 백 드리블에 애들은 놀라 자빠질 것이다. 농구는 우리를 멋진 사내로 만들어주었다. 모두 저마다의 포지션에서 가장 멋진 '나'를 구상할 무렵, 뚱딴지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했을까. 조그마한 여자애가,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여자애가, 눈이 크고 목소리는 더 큰 여자애가, 그러니까 듣도 보도 못한 당돌한 여자애가 골대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씩씩거리고 앉아있는 것이다. 여자애가 뭐라고 소리를 꽥 질렀다. 분명히 우리가 먼저 왔는데 너희가 뭐라고 비키라 마라 깡패처럼 구느냐, 이런 말이었다. 꼬마의 당찬 대거리에 순간 말문이 막힌 우리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겁도 주고 회유도 했지만 여자애는 요지부동이었다. 양 미간을 구기고 입술을 비쭉 내밀고는 우리 바스켓볼 사나이 6명을 번갈아 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졌다. 농구는 하지도 못했다. 여자애의 서릿발 같은 고집에 우리는 고개 숙인 남자들이 되었다. 결국 다 같이 농구하게 되었고, 우리는 일찍 친구들의 놀이가 끝날 때까지 '남'과 섞여 슈팅 연습을 하다가 여자애와 여자애의 오빠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3대 3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이렇듯 농구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농구 골대에 우수수 공을 던지던 아이들은 지금 세상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농구의 인기는 전과 같지 않다. 챔피언 결정전이 야구 개막전에 밀리고, 여자 농구팀은 하루아침에 해체된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증거일까. 우리는 어디서 어떤 폼으로 슈팅을 날리고 있나. 갑자기 멋진 포물선을 그리는 농구공이 보고 싶다. 바로 당신이 던지는.

*여자애의 일화는 소설가 윤성희의 경험담이다. 물론 여자애는 어린 윤성희다. <구경꾼들> 과 <웃는 동안> 을 읽은 독자는 알겠지만 그녀에게는 근사하고 재밌는 고집이 있다. 물론 어린 윤성희를 실제로 만난 적이 없지만(작가는 나보다 선배다). 나는 분명 그녀가 혼내준 바스켓볼 소년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서효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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