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 경제학과 2학년에 재학중인 이모(21)씨는 새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훌쩍 지났지만 전공서적에 필기를 한 적이 없다. 이씨는 수업 내용을'책' 대신 '공책'에 빼곡히 적고 있다. 책장을 넘길 때 손가락에 침을 묻히거나 접는 일도 절대 금물이다.
이씨가 애지중지 전공서적을 아끼는 건 한 학기 수업을 마친 후에 이 책을 되팔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씨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전공서 '미시경제학'도 지난 3월 학내 게시판을 통해 정가의 절반 수준인 2만원에 산 것이고 2학기 때 다시 중고 장터에 내놓을 계획이다. 주로 학내 게시판을 통해 거래되는 중고 전공서적은 새 책보다 최대 60%까지 저렴해 수요가 꾸준하다. 전공 교재가 바뀌거나 개정판이 나오지 않는 한 중고장터를 통해 여러 번 '손바뀜'이 일어난다. 이씨는 "책에다 필기를 하면 중고로 책을 팔 때 값이 확 떨어지기 때문"이라며 "고향이 지방이라 방값 등 생활비도 많이 들고 등록금도 계속 오르다 보니 줄일 것이 책값 밖에 없었다"고 중고책 마니아가 된 속사정을 털어놨다.
대학생들 사이에선 '전공서적 소유의 종말 시대'라는 말이 유행이다. 한 학기 수업을 듣기 위해 수만원씩 하는 전공서적을 여러 권 구입하는 게 부담이다 보니 중고책으로 사서 학기를 마치면 되파는 식이다. 고려대 4학년 김모(26)씨는 "대학원에 진학할 게 아니라면 취업한 뒤 다시 들여다보지도 않을 전공서적을 갖고 있을 필요가 없다"며 "매 학기 수업을 6, 7개 정도 듣다 보면 책값만 수십만원이 넘는데 그것도 부담"이라고 말했다.
대학 수업에서 전공서적이 부교재처럼 사용되는 것도 대학 내 중고책 매매가 활발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서울여대 정보보호학과 2학년 김소현(20)씨는 "주로 프레젠테이션 자료로 수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굳이 책이 없어도 수업을 듣는 데 무리한 게 없다"고 말했다. 성균관대 대학원생 박모(27)씨도 "교수님들은 학생들 주머니가 가벼운 것을 알기 때문에 웬만하면 책 없이도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자료를 웹하드에 공유해준다"고 말했다.
대학 내 중고책이 인기를 끌다 보니 학생회가 주도하는 '중고책 매매 대행'서비스까지 등장했다. 한국외국어대에서는 지난해 9월부터 매 학기초면 중고책 매매 장터가 열려 매 학기 400권 이상 거래되고 있다. 한국외대 일본학부 2학년 박은누리(19)씨는 "판매 희망가격을 적은 책을 학생회에 맡긴 후 영수증만 받아가면 학생회가 알아서 판매해 준다"며 "필기가 필요 없는 회화 수업이 많은 학교 특성상 일찍부터 중고책 매매가 자리잡았다"고 설명했다. 같은 학교 영어학과 2학년 김모(22)씨는 "요즘은 책을 살 때부터 빌려 쓴다는 마음가짐으로 책을 아끼는 친구들이 많다. 속내를 들여다 보면 중고매매를 염두에 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대학생들이 비싼 등록금, 생활비 상승 등 경제난에 시달리다 보니 빚어지고 있는 현상"이라며 "이제 전공서적을 추억으로 보관하는 것조차 사치가 돼 버렸다는 것으로 '아픈 청춘'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채희선기자 hsch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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